‘호남의 유관순’ 윤형숙 기리며 여수 밤바다에 젖는다

여수 앞바다 저녁노을이 무척 곱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독립운동가 윤형숙’ 매우 낯선 이름이다. “1900년 9월 13일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나 1950년 9월 28일 여수시 둔덕동에서 인민군에게 피살되다” 여수시민들도 잘 모른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시내 만세운동 현장에서 일경에 피체” 이쯤 해도 아직 낯설다.

‘호남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 얘기다. 마치 스무고개 하는 것 같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수립 100년을 맞아도 순국선열에 대한 우리의 지식수준은 아직도 낙제점 수준이다.

윤형숙 열사가 일경의 가해로 왼팔을 잃은 순간을 새긴 부조물

여수시(시장 권오봉)와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회장 오룡)가 27일 여수시청 여수문화홀에서 ‘의혈지사 윤형숙을 기억한다’를 주제로 학술대회(오후 2시),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묘소에서 추모제(오후 5시)를 여는 것도 ‘호남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를 좀더 알리고 그의 삶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다.

순국열사 윤형숙 묘비

윤형숙 열사의 치열한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우편국 앞을 돌아 본정통으로 행진하던 중) 시위군중 맨앞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윤 열사의 왼팔을 일본헌병이 군도로 내리쳤다. 쓰러진 열사는 유혈이 낭자한 땅에서 태극기를 다시 주워들고 일어나 만세를 더 크게 외첬다. 의롭고 장한 이 광경을 본 군중은 비분강개하여 격렬하게 시위를 계속하였다. 윤 열사는 왼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이 크게 다친 채 체포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받고, 수년간 군병원으로 추정되는 곳에 유폐되었다. 이후 장애의 몸으로 일제에선 항일운동을, 해방 후에는 전도사로서 선교활동과 문맹퇴치운동을 활발히 펴나갔다. 6.25전쟁 발발 후 서울수복일인 1950년 9월 28일 퇴각하는 인민군에 붙잡혀 여수 둔덕동 과수원에서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학살당했다. 정부는 2004년 윤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형숙을 기억한다 포스터

유족회 오룡 회장은 “인간 윤형숙 열사는 ‘호남의 유관순’ 그의 삶은 한마디로 ‘초인적 항거’”라고 말했다. 오 회장은 “여수에서 드물게 열리는 이번 전국 단위 학술대회가 윤 열사 삶을 기리는 한편 향토의 애국선열을 발굴·연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윤형숙 열사 순국 69주기에 열리는 이번 행사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후원한다.

다음은 윤형숙 열사 주요 연보.

△윤형숙(尹亨淑, 다른 이름 尹血女, 아명 안정엽. 1900.9.13.~1950.9.28.)
△1918년 순천 성서학원(은성학원, 현 매산학교) 보통과정 수료
△1918년 광주 수피아여학교 고등과정 입학
△1919년 3월 10일 광주시내 만세운동 현장서 체포됨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징역 4월 선고(4년간 유폐)
△원산 마루다신학교 수학
△전주 한예정신학교 기숙사 사감
△1927년 고창읍교회 전도사 겸 유치원 강사
△1936년 10월 13일 광주 양림동 201번지에서 취적
△1939년 여수로 귀향, 여수제일교회·여수중앙교회 전도사, 봉산예배당(현 여수영락교회) 전도사 겸 봉산학원 교원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화양면 창무로 피신
△1950년 9월 남면 심포리에 피신했다가 내무서원에게 체포됨
△1960년 3월 23일 묘지 이장(화양면 창무리 80), 묘비제막식 거행
△1963년 10월 2일 반공청년운동 표창장(내각수반 김현철) 수상
△2004년 대한민국 건국포장 추서
△2013년 묘지정비 사업

오는 27일, 9월 마지막 주말 여수 출신 순국열사도 기리고 가을 밤바다에 흠뻑 젖어드는 것은 어떨까? 

여수 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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