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히토 즉위 50일] 日‘헤이세이’에서 ‘레이와’까지···신구 왕실과 한일관계
[아시아엔=이정철 기자] 4월 30일 아키히토 일왕이 퇴위하고 일왕직을 아들 나루히토에게 물려주면서 헤이세이 시대(1989~2019)는 30년 막을 내렸다.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역대 일왕 중 가장 많은 국가를 방문했다. 1971년 유럽 순방과 1975년 미국 방문이 전부인 히로히토 전 일왕에 비해 아키히토 일왕은 30년 재임기간 36개국을 방문했다. 헤이세이 30년의 두배에 해당하는 쇼와(1926~1989) 63년간과 비교할 때 아키히토 일왕은 많은 국가를 방문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키히토 일왕의 ‘여행 다이어리’에 한국은 없었다. 한발만 내딛으면 코앞인 이웃국가 한국은 2차세계대전 동안 일본제국주의 피해 국가인 중국, 필리핀, 베트남 등을 포함해 그가 방문한 유럽보다 더 머나먼 곳에 자리잡은 국가였다.
그동안 한일관계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긴 했지만 한일 양국간 관계개선 의지가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히로히토 전 일왕이 사망하고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한 1989년 1월 8일 이후 한국정부는 꾸준히 일본정부에 일왕 한국방문을 제의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을 포함해 한국정부는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을 성사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일 정부 모두 일왕의 한국방문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일왕의 한국방문은 ‘심사숙고’와 ‘계산’이 필요했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 2002 월드컵은 아키히토 일왕의 한국 방문을 성사시킬 뻔했다. 그 전에 아키히토 일왕은 한일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2001년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특별한 유대감이 존재한다”, “일본 왕실은 백제의 후손이다” 등의 발언을 통해 한일관계 개선 의지를 보였다. 한일관계에 화해 무드가 맴돌자 한국정부는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 아키히토 일왕 참가를 제의했다. 2012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일왕이 한국 방문을 원할 경우에는 일제강점기 역사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둘 다 성사되지 않았다.
아키히토 일왕은 과거 한일관계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는 아니지만 “후회한다” 등의 발언을 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일본 방문 당시 아키히토는 “일제강점기라는 불행한 시기에 일본에 의해 겪은 한국인들의 고통에 대해 깊이 후회한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 히로히토 전 일왕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1984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양국간에 있었던 불행한 과거에 대해 매우 후회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일간에 쌓여 있던 응어리가 풀릴 정도로 충분히 사과였는가는 지금의 한일관계를 통해 재단할 수 있다. 아키히토 일왕에게 한국은 쉽게 풀리지 않는 난제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헤이세이 4년생”,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연호’
얼마 전 한국에서 아이돌그룹 TWICE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멤버가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연호 ‘레이와’에 대한 소감을 올렸다가 논란에 휩싸였다. 평소 그룹 공식계정에 개인 소감을 잘 올리지 않는 멤버였지만, 살면서 연호 교체를 보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특별한 경험이다. 자국 문화를 사랑하는 일본인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연호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정은 일본인들의 나이계산법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인은 자신의 나이를 서양력에 더해 연호를 사용해 표현한다. 예컨대 1992년생은 “나는 헤이세이 4년생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헤이세이가 시작 된 1989년부터 4년째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서양달력이 편하다고 하지만 연호 문화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에게 연호를 통한 ‘나이계산법’은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은 현재 전 세계에서 연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다. 일본에서 처음 연호가 사용된 것은 서기 645년 고토쿠 일왕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대전 패전국이 된 후에는 미군이 군주국 색채가 진한 연호의 공식적 사용을 금지하면서 한때 연호 폐지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1975년 연호 부활 운동이 시작됐고, 1979년 연호법이 제정되면서 연호가 공식 부활했다.
일본에서 새 왕이 즉위하면 연호부터 달라진다. 새 연호는 나이뿐 아니라 공문서의 날짜표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보통은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하는 서양력을 사용하지만 일왕 즉위 이후 재임기간을 나타내는 연호에 따라 날짜를 표기하기도 한다. 관공서 공문부터 개인 은행통장, 부동산계약서 등 각종 문서에 연호를 많이 쓴다. 연호가 바뀔 경우 해당 문서의 대대적인 수정이 이뤄지기도 한다.
연호는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일왕이 스스로 정했지만 이후 한문학자와 사학자 등 전문가들이 후보를 추천하면 정부가 내각회의에서 결정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79년 정한 6가지 기준에 따라 연호 후보를 선정하고 있다. 기준에 따르면 △2음절 한자 단어 △일본국민의 이상에 어울리는 의미 △쓰기 쉬울 것 △읽기 쉬울 것 △사회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 단어 △지금까지 연호나 시호로 사용되지 않은 단어일 것 등이다.
질서·평화·조화를 뜻하는 새 연호 레이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요수>에서 따왔다. 일본이 연호제 도입 이후 최초로 중국 고전이 아닌 일본 고전에서 인용하면서 새 연호 ‘레이와’는 주변국 관심을 집중시켰다.
서로 가깝지만 어색한 이웃
사상 처음으로 두 국가가 공동 개최한 2002년 한일월드컵은 스포츠를 통해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 동시에 ‘영원한 라이벌’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나 축구, 피겨스케이팅, 하키 등의 스포츠경기에서 한일전은 ‘무조건 이겨야 되는 경기’가 돼버렸다. 전 세계 국가대표들과 경쟁해 온 ‘태극전사’들은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어느 때보다 더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는다. 한일전이 시작되면 전 국민의 관심은 태극전사들에게 집중된다. 승리를 따내지 못한 태극전사들은 이른바 ‘대역죄인’이 되고 만다.
한일전만 보더라도 한일관계는 치열해 보이지만 두 국가 만큼 가까운 이웃도 없다. 한국과 일본은 K-POP, 음식, 관광 등 다양한 영역에서 교류하고 있다. 이를테면 라면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은 라면(일본어로 라멘)이 일본음식이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 이름 전부를 알고 있는 일본인 친구들의 K-POP 사랑도 대단하다. 반대로 일본인들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록밴드 X-JAPAN 노래를 여전히 듣고 있는 한국인들이 있다.
나루히토 일왕 즉위 후 헤이세이시대를 되짚어 보는 <교도통신>의 특집기사 속 연혁에서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바로 ‘욘사마’와 ‘지우히메’를 있게 한 드라마 <겨울연가>였다. 일본 NHK는 2004년부터 <겨울연가>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욘사마’에 대한 일본사회의 애정으로 한국과 일본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한국과 일본은 자연재해로 피해를 볼 때마다 서로 도우면서 가까운 이웃임을 재확인했다. ‘욘사마’ 배용준은 2004년 니가타지진 때 3억, 2011년 후쿠시마원전사고 때 10억을 기부했다. 그는 자신의 일본 공식홈페이지에 ‘동북 태평양 해안지진 피해자 여러분을 걱정하며’라는 제목으로 피해자들에게 “걱정된다. 안타깝다. 빠른 시일내에 회복되길 바란다” 등의 위로의 말을 전했다. 최지우, 송승헌, 이병헌 등의 연예인들이 기부 행렬에 동참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 X-JAPAN 리더 겸 피아니스트 요시키는 지난 봄 속초산불 피해자들을 도와달라며 1억원을 기부했다. 다른 멤버 토시는 2006년 한일평화콘서트 수익금을 위안부피해 할머니들에게 전액 기부하고, 태안 원유유출 피해 발생 때도 단독콘서트를 열어 수익금 전부를 기부했다.
‘상징 덴노제’···상징성을 초월하는 일왕 역할
일본에서 최고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주체는 총리(내각 총리대신)다. 총리는 정상회담 등 국가간의 관계에서 나라를 대표한다. 이전 일본헌법(메이지헌법) 제4조에 “덴노는 국가의 원수”라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패전 후 히로히토(쇼와 1926~1989) 덴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기로 하면서 일왕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를 ‘상징 덴노제’라고 한다. 덴노는 일본의 상징,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일 뿐 정치적 권한은 없다. 또한 현재 일본헌법에는 국가원수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다. 대신 △덴노가 국가원수라는 의견 △실질적인 기능을 생각해서 총리가 원수라는 의견 △원수가 없다는 의견까지 있다.
일본사회에서 일왕 역할 중의 하나는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왕실과 일본국민들 사이의 이질성 내지는 거리를 좁혀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역할을 일본왕실은 결혼식과 같은 공개 행사를 통해 수행해왔다. 또한 다양한 행사 참가를 통해 세속적인 일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일본국민들이 통치자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일본왕실이 처음부터 국민들에게 친근한 존재는 아니었다. 메이지유신(1853년) 이전까지 일왕은 베일에 싸여 있는 신적인 존재였다. 1881년 케임브리지대학 유학생이자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가 되는 스에마쓰 겐초는 궁내대신에게 이렇게 전했다. “수천년의 역사적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백성이 통치자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국가의 안녕은 없다. 이를 통해서 계속 친숙함을 유지하여 백성이 통치자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하자.” 당시 일본의 지배엘리트는, 일왕을 일상의 인간사와 동떨어진 존재로 만든다면 일왕이 국민공동체의 통합적 상징이자 당시 정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존재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일본왕실은 통치자와 국민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에 더해 국정운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왕의 행위에는 크게 국사 행위와 공적 행위가 있다. 국사 행위는 헌법 제7조에 의해 인정된 것이고, 공적 행위는 내각의 책임 아래 수행한다. 헌법 제7조에 열거된 국사 행위 중에는 외교에 관한 것은 제9호의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한다”는 규정뿐이다. 반면 외국 원수를 궁에 초대하는 일이나 직접 방문하는 일 등은 내각의 책임 하에 수행하는 공적 행위에 속한다. 직전 일왕인 아키히토의 외국원수와의 정상회담이나 해외방문 같은 외교활동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역대 일본내각의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일왕의 존재는 단순히 상징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 일본정부의 외교에서 왕실외교는 1960년대에는 일본의 대미 안보외교를 대신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제3세계와 자원외교의 첨병 역할을 했으며 1990년대에는 대중국 경제외교를 담당했다. 이처럼 왕실외교는 일본정권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이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아키히토는 총리나 외무대신이 하기 힘든 일을 해냈다. 그런 중에 대단한 성과도 있었다. 2009년 11월 14일 아키히토 일왕이 일본을 방문한 버락 오바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90도 인사를 받은 일이다. 패전국가의 왕이 승전국 정상에게 90도 인사를 받은 것은 왕실외교의 큰 수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키히토 전 일왕은 대중국 관계에서도 수확을 거뒀다. 일본을 원수처럼 생각해온 중국을 1992년 10월 23일 방문한 것이다. 한국과 더불어 일본을 가장 미워하는 중국에 발을 들여놓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미우나 고우나 함께 갈 수밖에 없는 나라다. 세계에서 일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중국과 한국 국민이다. 위안부 피해자·강제징용·역사교과서 등을 소재로 일본의 도덕성을 떨어뜨리는 국제여론의 상당부분은 한국 국민들에 의해 조성돼온 게 사실이다. 이는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분위기는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이미지 관리에 민감한 일본 입장에서 한국과의 관계개선은 필요조건이다.
이제 공은 새로운 일왕 나루히토 일왕에게 넘어갔다. 59세의 나루히토 일왕은 2남1녀 중 맏이다. 나루히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유학 경험이 있다. 그는 대학시절 영국 옥스퍼드 머튼대학 유학생이었다. 아내 마사코 왕비도 외교관 출신으로 왕실외교에 큰 조언자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새 연호 ‘레이와’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마음을 주고받는 가운데 문화가 태어나 자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본 정부는 “봄의 도래를 알리는 멋지게 핀 매화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의 희망과 함께 각각의 꽃을 크게 피우고, 그런 일본이 되기 바란다는 소원을 담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새 연호가 담고 있는 의미가 한일 양국의 미래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