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연호가 새로 바뀐다

황태자 나루히토 친왕

[아시아엔=편집국] 헤세이 31년(2019년) 5월부터 황태자의 천황즉위식과 함께 일본의 연호가 새로 바뀐다. 올해의 연호는 4월까지 ‘헤세이’이지만, 5월부터 새로운 연호, 즉 천황이 바뀐 그 해의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지금의 천황이 올해 4월 30일자로 퇴위하여 5월 1일 황태자가 새로운 천황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최초 연호는 645년 시작된 ‘다이카’(大化)이다. 지금의 ‘헤세이’(平成)는 247번째 연호다. 옛날에는 천황이 새로 바뀌었을 때뿐 아니라, 재해 및 축하할 일이 있을 때에도 연호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천황 재임 시 8개의 연호를 사용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천황이 새로 바뀔 때 새로운 연호가 결정된다.

새로운 연호는 아시아의 역사와 일본의 문학 등을 깊이 연구하는 경륜 있는 학자들이 심사숙고한 후에 한자 두자를 사용하여 읽고 쓰기 쉬우며 좋은 뜻을 가진 단어들을 골라서 제안한다. 그러면 총리 대신들이 모여서 회의를 거쳐 그 중 하나를 결정한다. 일본 정부는 아직 새로운 연호가 무엇이 될 지 발표하지 않았다.

1989년 필자가 남편의 일로 도쿄 체재 중 오부치 게이죠 관방장관이 헤세이(平成)라고 쓰여진 족자를 들고 새 연호를 발표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들은 인품 좋기로 소문난 오부치를 ‘헤세이의 남자’라고 불렀다. 안타깝게도 그는 수상이 되었을 때(2000년) 관저에서 뇌졸중을 일으켜 생을 마감했다.

2019년은 황태자가 천황이 되는 5월 1일이 축일이 되어, 4월 27일부터 5월 6일까지 10일 동안 휴일이 계속된다.

여기서 헤세이 시대에 발생하여 일본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사고를 살펴본다.

1989년(헤세이 원년)

-4월 소비세(세율 3%) 도입

-6월 천안문사건(중국 민주화운동)

-11월 베를린장벽 붕괴(미소냉전 해소)

-12월 닛케이 한해 평균 사상최고치 3만8957엔 기록

1991년(헤세이 3년)

-1월 걸프전(이라크, 쿠웨이트침공)

-3월 버블붕괴(일본 부동산 하락)

-12월 소련붕괴(고르바초프 사임)

1993년(헤세이 5년)

-8월 자민당 퇴진(非자민당 호소카와 내각 등장)

1995년(헤세이 7년)

-1월 한신 아와지 대지진

-3월 지하철 사린(독극물) 사건

1997년(헤세이 9년)

-11월 홋카이도 탁쇼쿠은행 파탄, 야마이치증권 폐업

1998년(헤세이 10년)

-2월 나가노 동계올림픽

1999년(헤세이 11년)

-1월 유로 도입

2001년(헤세이 13년)

9월 미국 9·11 테러사건

2002년(헤세이 14년)

-6월 한일 월드컵축구

2003년(헤세이 15년)

-3월 이라크전쟁

2007년(헤세이 19년)

-10월 우체국 민영화

2008년(헤세이 20년)

-4월 후기고령자 의료제도 시작

-9월? 리먼 쇼크

-11월 오바마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 당선

2011년(헤세이 23년)

-3월 동일본대지진

2017년(헤세이 28년)

-1월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정리하다 보니, 일본에서는 지진 이외에는 그다지 큰 사건은 없었던 것 같은데, 세계는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었다. ‘헤세이’는 사람·물건·돈이 국경을 넘어 자유로이 왕래하는 글로벌리즘(Globalism)의 역동적인 시대였다. 이 시대는 바로 모든 것이 세계적인 규모로 움직이고 신속하게 진행되던 국제화시대였다.

한편 최근 화제가 된 <신일본의 계급사회> 저자 하시모토겐지 와세다대 교수는 1988년 11월 19일자 <아사히신문> 사설에 ‘격차사회’라는 말을 처음으로 소개하며 ‘격차사회-이대로 괜찮은 것인가?’라는 칼럼을 썼다. 연호가 헤세이로 바뀌기 약 2개월 전 쇼와(1926-1989)의 마지막 국민생활백서는 “국민들의 격차에 대한 인식수준은 성숙해지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이 “격차는 확대됐다”고 실감하고 있지만,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격차를 용인하는 경향이 많다고 당시 보도했다.

그후 30년 아사히신문은 “버블의 붕괴, 취직 빙하기, 워킹푸어···.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불합리에다 당사자들도, 방관자들도 어쩔 수 없다는 혼잣말처럼 사회는 일그러진 쪽으로, 과잉으로 성숙해졌다”고 언급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젊은이들은 고용환경과 노동조건의 변화에 속수무책이었다. 경기침체로 일본 젊은이들은 갈수록 나약해지고 있다는 담론이 퍼졌다. 그것은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즉 ‘취업 의욕이 없는 자발적 실업자’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청소년 취업에 대한 정책은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개개인의 생존을 주장하는 사회 풍토가 만연했다(도쿄대 혼다 유키 교수·교육사회학). 이는 2006년 아베 정부의 교육기본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혼다 유키 교수의 설명을 좀더 살펴보자.

“행복감과 만족도는 높지만 젊은이들은 자기 부정적이며 자신의 능력만으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도통 없다. 그리고 현상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바꾸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잔인할 정도로 개별화된 의식’이 헤세이의 젊은이들 사이에 넓고 깊게 침투하고 있다.”

한편 천황은 어디까지나 국민통합을 위한 ‘상징적 인물’일 뿐이다. 일본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균열과 갈등을 극복하여 ‘함께 살아가는’ 연대의식을 이끌어낼 책임은 정치에 있다. 그런데 정치는 지금 그 책임을 천황에게 떠넘기고 있다. 일본인들이 안고 있는 불안과 불만을 외면한 채, 절대권력을 통해 국민을 이끌어가려는 안이하고 무책임한 정치에 맞서 국민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목소리 높여, 정치가 책임을 완수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국민 스스로가 이러저러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는 강한 의식과 의지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원하는 사회를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것 이것만은 이 시점에서 확실하다.” 이제 곧 헤세이 시대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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