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향후 10년 ‘패러다임 전환’ 보여줄 것”
<인터뷰>동일본대진재 현장 다녀온 한영혜 서울대 일본연구소장
2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동일본대진재(大震災). 1주년 사흘 전인 3월8일 서울대 일본연구소(소장 한영혜) 주최로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동일본 재해현장에서 바라본 ‘부흥’의 딜레마’란 주제로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심포지엄 책자를 보니 지난해 3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행사였다. 5~7명으로 꾸려진 연구팀은 5월19~25일, 올 1월31일~2월6일 두 차례의 현지조사까지 다녀왔다. 독자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일본을 연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준비 기간과 연구 성과에 비해 행사는 조용하게 치러졌다. 이 정도 행사라면 큰 장소에서 일본 대사, 대학 총장 등 중요 내빈을 불러 ‘뻑적지근하게’ 할 만도 한데, 주최 측 대표 인사말도 생략된 채 바로 현지조사 보고가 진행됐다.
사회를 본 조관자 일본연구소 교수는 담담한 어조로 “예정시간보다 빨리 장소를 비워야 해서 바로 발표에 들어간다”며 “한영혜 소장이 병원에 입원 중이라 인사말도 글로 대신 한다”고 전했다. 16일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 지하 카페에서 만난 한영혜 소장은 “이번 심포지엄이 조촐하게 치러진 것에 대해 연구소 내에서도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연구소는 양질의 연구결과를 축적해 나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며 만족해했다. 한 소장은 퇴원 후 통증에 대한 원인 검사 차 병원에 방문 중이었다.
– 몸은 괜찮나.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안 나왔는데, 담석에 의한 통증 같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입원은 잠깐 했고 오늘은 검사받을 게 있어 들렀다.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심포지엄에 참석하지 못해 찾아준 분들께 미안하다”
8일 심포지엄에서?피재민의 생활세계와 일본의 부흥, 동일본대진재와 산업구조의 전환, 도후쿠 지방의 지역체계 변화, 동일본대진재와 지역재생의 공간정치, 폐허의 현장 위에 연출된 위안, 동일본 지역의 탈원전을 둘러싼 실천의 의미 등이 발표됐다. 대진재 이후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의 산업,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에 대한 총체적 연구였다.
– 동일본 대진재에 대해 경험적 연구가 인상깊다.
“대진재 1주년을 맞이해 여러 곳에서 학술행사를 진행한 것으로 안다. 많은 곳이 일본 현지 전문가를 초빙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 중심으로 행사를 열었다. 교훈에만 집중하면 더 중요한 것을 못 본다. 우리는 일본 전문 연구소로서 현장을 직접 방문해 대진재는 무엇이고, 일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앞으로 일본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 나갈 지 분석했다. 일본 사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 연구소의 목적이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가 있다. 테크닉만 가져와서는 안 된다. 독자적으로 연구 역량을 강화해 일본 현지 연구소와 대등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 동일본대진재 사건의 의미라면.
“동일본대진재는 막대한 피해도 피해려니와 복합재해라는 성격, 그리고 아직 진행 중인 사건이며 종료의 시점을 명확히 전망하기 어렵다는 점 등에서 과거 어는 대진재보다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일본을 넘어 국제사회에 인간의 안전보장과 관련된 중대한 이슈들을 제기하고 있다. 일본연구자로서 동일본대진재와 관련해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이 사건이 일본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과 연결된 점이다. 동일본대진재가 일어나기 전부터 ‘전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와 더불어 일본의 시스템 전환,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후’를 대신할 ‘재후’라는 표상도 대두됐다.”
– 조사 지역은 어디였나.
“지진, 쓰나미, 원전으로 인한 피해와 복구과정이 각기 상이하게 전개되고 있는 후쿠시마현(후쿠시마), 미야기현(센다이, 게센누마, 오나가와, 이사마키), 이와테현(오후나토, 리쿠젠다카다)을 다녀왔다.”
후쿠시마 들어갈 때 방사능 수치 높아 걱정하기도
– 원전 피해지역인 후쿠시마는 여전히 위험하다고 알려졌다.
“7명의 연구원 중 4명이 후쿠시마에 들어갔다. 신혼부부나 건강이 걱정되는 분들은 선택에 맡긴다고 했다. 후쿠시마에 도착한 날, 지역 신문을 보니 그날 방사능 수치가 가장 높아 겁도 났다. 더욱이 숙소로 잡은 현청 지역이 심했다. 원자력발전소 온도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상승한다는 뉴스까지 접해 책임자로서 걱정을 많이 했다. 어떤 분은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신발, 옷을 다 버리고 와야 한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기도 했단다.”
– 많은 주민들을 만났다. 거부반응은 없었나.
“피재지 관공서는 무척 바쁠 것이고, 주민들도 여유가 없어 7명이나 되는 집단이 연구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번거롭게 구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문한 모든 곳에서 친절하고 성의 있게 대응해 주었을 뿐 아니라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주민들에게 들었다.”
– 정부의 대책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불만을 말하는 주민들은 없었는지.
“그분들은 ‘도후쿠(東北) 사람은 잘 참도록 강요돼왔다’는 말을 들려줬다. 그래서 큰 소리를 내기보다는 자신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편이라고 했다.”
– 불가항력적인 일을 당하면 종교에 더 의지하게 될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의 삶에 종교가 녹아 있다. 정부의 부흥개혁에서도 처음 나온 말이 ‘증혼’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더욱 밀착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종교심이 더욱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나 기타 종교로 가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대진재에서 신사들의 피해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폐기물’ 처리도 원칙대로···그 속에 담긴 피재민들의 삶
– 현장을 둘러본 소감은.
“가서 직접 보고 오니까 기존의 동일본대진재 자료들도 모두 새롭게 보인다. 피재민에 대한 생각도 많아졌다. 쌓여진 폐기물을 쓰레기 더미로 표현하는데, 그게 쓰레기로 보이지 않았다.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을 뿐 잘 분리돼 정돈돼 있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닌 곳도 많았지만. 왜 더딜까 현장에서 일하는 분에게 물었더니, 함부로 치울 수 없다고 하더라. 규정에 의해 처리해야 하고 또 그 안에 사유재산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 속에는 가방, 사진, 주방 기구 등 삶이 있었다. 더디긴 하지만 규칙을 지키려는 그 속에서 일본을 본다.
생활터전이 사라지면서 일자리도 잃었다. 돈을 버는 일자리는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일자리는 삶이다. 그 안에서 인간관계가 이뤄진다. 일본 부흥의 과정에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의문이다.”
– 일본전문가로서 향후 일본을 전망한다면.
“일본 정부의 동일본대진재 부흥의 목표 기간은 진재 발생시기를 포함해 10년으로 설정됐다. 향후 10년간 전개될 부흥의 과정은 일본의 전후 이후의 패러다임이 재구축돼가는 양상을 보여줄 것이다. 어떤 부분은 이전과는 180도 다른 전환이 되고, 어떤 부분은 지속 또는 회귀의 양상을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부분은 이미 진행 중이던 것이 진재 부흥을 계기로 급가속화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흐름들의 총체가 어떤 모습일지 지금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동일본대진재의 부흥 과정을 상이한 주체들의 역학에 주목하며 섬세하게 탐구해가는 것이 일본연구자로서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서울대 일본연구소는
1995년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에 일본연구실이 설치된 이후 일본연구의 활성화와 한일 상호이해의 증진을 목표로 2004년에 설립됐다. 동경대는 작년에 현대한국연구센터를 설립했다.
2008년 한국연구재단 인문학국(HK) 해외지역연구소로 선정돼 새로운 도약의 장을 마련했다. ‘현대일본 생활세계 연구의 세계적 거점 구축’이라는 장기적 비전하에 새로운 지역연구의 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HK교수 및 연구교수 등 총 11명의 일본전문가가 전임연구진을 구성하고 있으며 학내외 유수한 일본 연구자들이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학문적 소통 활성화와 연구의 질적 발전에 기여하고자 학술지 ‘일본비평’과 연구 성과를 종합한 ‘총서’를 발간하고 있다. 일본비평의 편집장은 윤상인 한양대 일본언어 문화학과 교수가 맡고 있다.
일본연구소는 일본에 매몰되지 않은 일본연구를 위해 독자적인 관점과 글로벌한 시각을 동시에 추구한다. 한영혜 소장은 “편협한 국익을 넘어서는 공공성과 인간의 존엄성 확보에 기여하는 지역연구를 정립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