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탈원전 운동’은 왜 확산되지 않았나
* 다음은 <동일본대진재 1주년 심포지엄>에서 박지환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가 ‘동일본 지역의 탈원전을 둘러싼 실천의 의미’에 대해 쓴 글을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주>?
일본에서 원전 반대시위가 일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미온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후쿠시마의 원전 폭발 같은 재난이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탈원전을 주장하는 수 십 만 명의 군중들이 촛불을 들고 시청, 광화문 광장으로 모이지 않았을까.
일본의 경우 지난해 4월10일 고엔지에서 1만5천명, 9월11일 메이지공원에서 6만명이 탈원전 데모에 참가했다. 전국적으로는 7만2천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독일에서는 대진재(大震災) 다음날인 3월12일 6만여 명이 참여하는 탈원전 시위가 일어났고, 26일에는 ‘후쿠시마를 보라, 모든 원전을 폐쇄하라’는 슬로건 하에 전국적으로 26만명, 베를린에서만 1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탈원전 집회가 열렸다.
왜 일본에서는 탈원전 운동이 확산되지 못했을까. ‘시민혁명 한 번 없었던 나라’라는 일종의 무력감이 팽배해서일까. 일본의 매체들은 전후 일본의 원자력 발전 도입을 둘러싸고 형성된 중앙-지방의 권력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모든 계층 이해관계 얽혀 원전 비판 공론화 안 돼
중앙의 원자력촌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내세우며 원전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거나 묵인해온 ‘정-관-재-노-학-언’ 간의 공모관계에 의해 유지됐다.
자민당의 정치가들은 정당에서 펴내는 출판물에 광고를 싣는 형태로 전기산업연합회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아왔다. 경제산업성과 문부과학성에서 원자력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관료들은 퇴직 후 원자력회사 관련 기관에 재취업해 왔다. 이와 같은 정관계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전력회사들은 지역별로 전력의 생산 및 공급을 독접하는 구조를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이윤을 확보하고 있다.
민주당도 자민당과 마찬가지로 원전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나 전국전력관련산업노동조합총연합 등의 노동조합은 민주당에 정치헌금을 내고 일부 노동조합 간부를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에 진출시켰다.
학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지지하고 원전의 안전성을 보증해 주는 대신 전력회사로부터 연구비를 받거나 공직에 진출해 왔다. 원자력 개발에 비판적인 학자는 대학 사회 내에서 배제 당했다.
언론은 전력회사가 주요 광고주-전력회사는 연간 1,000억 엔을 광고비로 지출-이므로 원자력에 비판적인 보도를 꺼린다. 이처럼 ‘정-관-재-노-학-언’은 서로 긴밀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원자력 산업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이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원전 입지 지역민 이해관계’ 그리고 ‘핵무기 개발의 잠재적 가능성’
지방의 원자력촌은 원전이 실제로 입지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도 지지돼 왔다. 원전 관련 기업은 노동력 중 1/4~1/3을 지역에서 충당하기 때문에 원전 입지 지역주민들은 원전 건설에 따른 직접적인 고용효과를 누린다. 또 원자로 정기검사 때 외지에서 노동자들이 유입되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민박이나 음식점도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그밖에 원전 건설에 따른 막대한 자금이 교부금과 세금의 형태로 원전이 입지한 마을과 인근 자치제에 유입됐다.
위와 같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원전을 자발적으로 유치해온 지방 주민들의 근대를 향한 욕망도 한몫 했다. ‘자발적 복종’의 배후에는 도시주민과 같이 성장의 경제적·문화적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있었다.
일본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자원의 부족을 극복하고 과학기술을 통해 서구와 동등한 수준의 경제발전을 달성하려는 근대 일본의 오랜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나아가 2차 대전 이후 세계질서 속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곧 강대국이 되는 조건이었으므로 전후 일본의 정치가들은 일관되게 핵무기 개발의 잠재적 가능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김남주 기자 david9303@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