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중국과 남북한, 어디가 먼저 통일될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대만의 집권 국민당 명예주석 롄잔(連戰)이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 3차 국공합작에 가까운 논의를 벌이고 있으나, 대만 국민의 64%가 통일에 반대하며, 특히 20대는 82%가 통일에 반대한다고 한다. 최근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에 의해 손문의 동상이 끌어 내려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에게는 중국과 대만에서 다같이 국부로 존숭되는 손문도 한낱 국민당의 영수(領袖)일 뿐이다.
이들은 “국민당은 물러나라”고 외쳤다는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화민국은 떠나라”고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중화민국은 국민당이고, ‘우리’가 아닌 것이다.
중국 본토를 모택동에 잃고 대만에 내려온 장개석은 마치 천하를 두고 劉邦과 다투던 項羽의 신세였으나 심기일전하여 국민당의 부패를 척결하고 민생안정에 집중, 대만의 경제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정치는 철저한 국민당 독재였다.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蔣經國)의 뒤를 이어 대만 출신의 이등휘(李登輝)가 집권하였고 1980년에는 민진당의 천슈이벤(陳水扁)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나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가 집권하자 陳水扁은 부패혐의로 투옥되어 태국의 탁신 신세가 되었다.
대만과 중국이 하나가 될 것 같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국공합작(國共合作)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지 대만과 중국의 통일이 아니다. 시진핑은 혈육은 헤어질 수 없다지만, 대만인들에게는 중국과 대만은 같은 혈육이 아니다. 명나라의 정성공의 개척 이래 대만인은 오랫동안 본토와 떨어져서 살아왔다. 장개석과 더불어 대만에 온 사람들(외성인)과 토착민(본성인)의 완전한 융화는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성인은 90%에 달하며 외성인은 10%에 불과하다. 그 갈등이 폭발한 것은 1947년 2·28사건이다. 당국이 발표한 사망자만 2만8천명이라는 이 참극은 1980년 한국의 광주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대만인에게 국민당은 ‘남’이다.
중국의 경제가 발전하여 대만과의 격차가 줄어들면 통일에 찬성하는 여론이 늘어날 것 같지만 이 역시 간단하지 않다. 총량으로서의 중국경제는 미국의 절반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 제2위이다. 그러나 내륙 인민의 생활은 아직도 후진국이다. 중국은 일국양제(一國兩制)로 홍콩 마카오를 흡수하면서 이 방법이 대만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준다는 데 큰 의의를 두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다. 중국의 환경오염은 심각하다. 한국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스모그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문제 제기에 중국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있냐고 오리발을 내민다.
대만인들의 ‘삶의 질’은 중국인보다 훨씬 높다. 중국과 대만이 합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는데 굳이 공산당 독재와 오염 투성이의 대륙과 합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대만 젊은이들의 생각인 것이다.
이등휘의 중국칠괴론(中國七槐論)이 마냥 허황한 것만은 아니다.
중국과 대만의 통일보다도 남북한의 통일이 더 가까울 수 있다. 남북 공히 6.25의 비극을 기억하는 세대는 지나가고 있다. 구원(舊怨)이 없는 남북의 디지털세대는 훨씬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 “북한의 구제역 확산 방지를 위해 지원하겠다” “북한 영유아를 위해 분유를 지원하겠다” 이런 노력들이 통일로 가는 일보 일보(一步 一步)다. 통일준비위를 만든다는데 통일을 준비하고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노력은 바로 이런 것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더욱 멀어질 것 같은 중국과 대만의 통일보다 남북한의 통일은 훨씬 가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