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이영하와 에릭 하이든‧‧‧빙상 영웅 이영하 1976년 이탈리아 선수권 우승

이영하 선수 <사진 코리아헤럴드>

[아시아엔=김현원 연세대의대 교수, 뉴패러다이머] 1970년대 대한민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영웅 이영하 전 국가대표 감독이 담낭암으로 2019년 2월 25일 별세했다.

1976년 1월 대학 입학시험을 마치고 바로 다음날 라디오에서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이영하가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의 에릭 하이든(아래 사진)을 제치고 우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낯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올림픽 금메달이 놀랄 일이 아니지만 당시는 비록 주니어 대회이지만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 소식은 놀라운 것이다.

한국 축구는 월드컵은커녕 올림픽 예선에서도 말레이시아에 밀려 탈락할 때였다. 당시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태국의 킹스컵에서 우승하고 카퍼레이드를 벌일 때였다.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한번도 따지 못했다.

몇달 뒤 그해 여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양정모가 레슬링에서 드디어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당시 필자는 종로를 걷고 있었는데 금메달이 확정되자 애국가가 울려퍼졌던 기억이 있다.

아마 한국 여자농구의 1967년 체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과 1973년 여자탁구의 사라예보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 금메달을 땄던 것이 그때까지 한국 스포츠의 최고 영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던 시절이었으니 비록 주니어였지만 세계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이 매우 낯설었다. 더구나 나와 같이 고등학교를 이제 졸업하는 나이의 이영하였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이영하는 그 후 스피드 스케이팅 전 종목에서 한국신기록을 50회 이상 기록했던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영웅이었다. 이영하는 선수로서 은퇴 후에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후배를 지도했다. 지금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은 동계올림픽 금메달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이영하에 뒤져서 준우승을 한 에릭 하이든은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든 전설이다. 1980년 레이크 플레시드 동계올림픽에서 에릭 하이든은 500미터, 1000미터, 1500미터, 5000미터, 10000미터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단거리와 장거리는 쓰는 근육이 다르기 때문에 단거리선수가 장거리 종목에서 우승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스포츠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릭 하이든 그 상식을 깨 버렸다. 육상에 비유하면 100미터의 우사인 볼트가 마라톤까지 우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에릭 하이든이 생애 유일하게 금메달을 놓친 것이 1976년 이태리 세계주니어선수대회에서 이영하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1980년 레이크 플레시드 동계올림픽 5관왕 이후 에릭 하이든은 스피드 스케이팅을 은퇴하고 사이클 선수로 변신하기도 했다. 에릭 하이든은 원래 다니던 스탠포드대학에서 의과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된 후 미국 스피드 스케이팅팀의 팀닥터로 한국을 방문해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이영하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에릭 하이든은 전 종목에서 강한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에 단일 종목에서 금메달을 놓칠 수는 있었지만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과 같이 종합점수를 따지는 경우에는 절대로 질 수가 없었는데 생애 유일하게 이영하에게 진 것이다. 그러나 이영하도 에릭 하이든과 같이 특별한 재능을 지닌 괴물이었다.

이영하 역시 500미터부터 10000미터까지 스피드 스케이팅 전 종목에서 한국신기록을 보유했고, 신기록을 50차례 이상 기록했다. 이영하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바 있었지만 본인의 재능에 비해서는 운이 없었다. 더구나 체계적인 과학적 훈련을 받고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올릭픽 전 종목 우승을 이룬 에릭 하이든에 비해서 제대로 된 지도자도 없었던 한국에서 이영하의 성장은 한계가 있었다. 에릭 하이든이 체계적, 과학적으로 훈련받는 모습은 뉴스와 다큐멘터리에 여러 번 소개되었다

에릭 하이든이 전 종목 금메달을 딴 레이크 플레시드에서 이영하의 컨디션도 매우 좋았다. 동계올림픽 바로 전 월드컵 500미터에서 에릭 하이든보다 기록이 좋았던 이영하는 깜짝 메달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영하는 경기 전날 연습트랙에서 차단막에 부딪치며 코가 주저앉는 부상을 당했다. 제대로 숨도 못 쉬면서 이영하는 메달권 진입에 실패했고, 에릭 하이든의 우승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선수로서 따지 못했던 올림픽 메달은 이영하가 감독으로서 키워낸 김윤만이 1992년 알베르빌 1000미터에서 은메달로 성취되었다. 그 후 한국 빙상은 나날이 발전해서 뱅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모태범과 이상화의 남녀 500미터 금메달과 남자 최장거리 이승훈의 10000미터 금메달로 이어졌고, 대한민국은 올림픽에서의 메달이 낯설지 않은 빙상강국이 되었다.

대한민국 빙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기억되는 이영하, 그는 특별히 나와 동년배이기에 더 기억된다. 삼가 그의 죽음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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