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승부'(勝負) 홍사성 “썩고 문드러져서 잘난 척 할 일 없을 때까지”

흐르는 강물처럼, 이기고 지는 것도 흘러 가고 만다.

개를 만나면 개에게 지고
돼지를 만나면 돼지에게 진다

똥을 만나면 똥에게 지고
소금을 만나면 소금에게 진다

낮고 낮아서 더 밟을 데 없을 때까지
새우젓처럼 녹아서 더 녹을 일 없을 때까지

산을 만나면 산에게 지고
강물을 만나면 강물에게 진다

꽃을 만나면 꽃에게 지고
나비를 만나면 나비에게 진다

닳고 닳아서 무릎뼈 안 보일 때까지
먼지처럼 가벼워서 콧바람에 날아갈 때까지

꽃잎 떨어져야 열매 맺듯
이기면 지고 지면 이기는 것

썩은 흙이라야 거름 되듯
무조건 진다 지고 또 지고 또 진다

썩고 문드러져서 잘난 척할 일 없을 때까지
끝까지 져서 아무도 못 이길 때까지

 

 

# 감상노트

누군가를 이겨보겠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못 이길 때까지 끝까지 지겠다는 마음이 있다. 지고는 못 산다는 아상(我相)으로 가득 찬 마음이 있는가 하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아는 마음이 있다. 아상을 버리니 더는 이를 데 없는 경지가 있다.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마음에 고개 숙여 합장한다.  (홍성란 시인 ·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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