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3돌-구소련 강제억류①] 문재인 정부 15개월 ‘강제억류 문제’도 관심을

15일은 광복절 73주년과 대한민국정부수립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 36년의 질곡을 넘어 해방을 맞고 3년만에 (남한만의 단독이긴 하지만) 정부가 수립됐다.?독립을 얻고도 고국땅에 오지 못하고 연합국이던 소련에 억류됐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해 조국은,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시아엔>은 문순남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추적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살펴봤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내 아버지의 이름은 문순남(文順南)이다. 1945년 6월 일본군대에 동원되어 만주 봉천(선양)에서 일본제국 히로히토 천황(昭和天皇)이 연합국에 항복선언을 한 8월15일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다. 소련은 유럽전쟁이 끝난 3개월 후 8월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170만 병력과 T34 신형탱크를 앞세워 일본이 점령하던 만주(滿洲)와 북한, 사할린(樺太), 쿠릴열도(千島列島)일대를 침공했다.

태평양전선과 동남아 지역에서도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에 패전을 거듭하고 본토마저 미군기의 잦은 공습으로 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일본이 자랑하던 관동군(關東軍) 정예병사들은 본토방어를 위해 오끼나와 등으로 이동한 상태에서 만주에 체류하던 거류민과 식민지에서 보충된 신입병력으로 소련군에 맞서야 했다. 소련의 침공 3일전 본토 히로시마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전의를 상실한 관동군은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했다.

8월16일부터 관동군 부대는 무장해제되고 소련군이 지정한 장소로 집결했다. 병사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고 전쟁이 끝났으니 집에 돌아갈 행복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그들을 화물열차에 태워 어디론가 이동 시켰다. 밤낮으로 달린 열차는 소련영토로 가고 있었다. 사전 안내도 없었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부 소수의 병사들은 정차 역에서 현지 주민으로부터 소련으로 가고 있는 열차라는 얘기를 듣고 탈출 했다. 그렇게 소련 영토로 이송되고 소련연방 각지의 수용소에 천명 단위로 분산 배치됐다. 아버지는 10월쯤에 소련연방 카자흐스탄 중부 ‘카라간다(Karaganda) 99수용소’에 도착하고 예하 여러 분소를 거치며 그곳에서 3년4개월 강제 노동을 당했다.

아버지는 1924년생으로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청교면(靑郊面) 유능리(裕陵里)가 고향이다. 어린 시절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익혔고 초등학교도 몇 년 다녔다고 했다. 가업으로 이어진 논농사를 돌보며 살다 혼인하고 징집명령이 의해 일본군에 입대했다. 개풍군은 지도상 북위 38도 남쪽에 위치해 6.25전에는 남한이었지만 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며 북한 땅이 된 곳 이다. 조선은 일본제국주의 치하에 있었고 조선을 통치하던 총독부는 전시상태에서 일상 생활용품까지 배급제로 전환해 삶이 무척 어려웠던 시기였다.

제국의 야망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자원이 풍부한 만주에 괴뢰정부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부(軍府)의 자신감은 1937년7월 베이징 서쪽 노구교(盧溝橋)를 지키던 중국 군을 기습공격하며 중일전쟁(지나사변)이 시작되었다.

1938년 4월 한반도에서 ‘국가총동원령’을 공포(公布)하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수탈하고 젊은이들을 전쟁물자를 생산하거나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현장으로 내몰았다, 이 시기에 수많은 어린 소녀들도 근로정신대로 뽑아 일본으로 데려가 군수공장에서 혹사 시켰다.

1944년 징병제가 도입되고 만 20세가 된 24년(갑자), 25(을축)년생 청년들은 징집명령을 받고 45년6월 또는 8월초에 입대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부대에 배치된 조선인들은 일본이 항복하자 곧바로 포로 신분이 되면서 시베리아 등 지역에서 수용소에 갇혀 중노동을 당했다. 진작에 그곳을 벗어나야 했으나 소련정부는 한반도에 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조선출신 포로들의 건의를 묵살했다. 일본출신 포로들이 47년 초부터 본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했다.

소련전역에 분산 배치되었던 조선출신 포로들은 고국귀환을 위해 소련의 극동 하바롭스크(Khabarovsk)지역 380수용소에 집결했다. 48년 12월19일 조선출신 2300명은 나호트카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다음날 흥남 부두에 도착했다. 조국은 미?소 냉전의 산물로 남?북이 분단되어 각기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49년 2월초부터 남한출신 500명은 무리로 나뉘어 경원선 열차를 타고 접경지역에 도착했다. 도보로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총격을 받아 30여명이 희생되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대부분은 경계병에 잡혀 고양(파주)경찰서나 양주경찰서로 호송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조국에 돌아왔지만 처한 현실은 기가 막혔다. 생존자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서 있는 동안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 조사하고 폭행도 했다. 이후 인천송현동 전재민 수용소로 재 이송되었다. 전재민 수용소에 있던 한달 동안 가마니를 이부자리 삼아 생활하고 한국군, 미군 방첩부대와 경찰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고 마침내 3월26일부터 고향으로 출발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어쩔 수 없이 일본군대에 가야 했고 집을 떠난 지 3년10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아버지가 고향에 나타나자 죽었다고 했던 순남이가 돌아왔다고 마을은 온통 난리가 났다. 소련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외부에 알릴 수 없었으니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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