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3돌-구소련 강제억류④] 23살 아버지 자필 본 나는 피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글 필자(문용식)의 부친 문순남(오른쪽)의 유일하게 남은 사진. 휴전 후 54년 1월~58년 1월  1사단에서 복무 중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고 문씨는 말했다. <사진=문용식 제공>


15일은 광복절 73주년과 대한민국정부수립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 36년의 질곡을 넘어 해방을 맞고 3년만에 (남한만의 단독이긴 하지만) 정부가 수립됐다. 
독립을 얻고도 고국땅에 오지 못하고 연합국이던 소련에 억류됐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해 조국은,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시아엔>은 문순남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추적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살펴봤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나는 한국에서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판단하고 일본정부에서 찾아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후생노동성에 ‘미나미하라 주난(南平順南, 남평순남)’의 가족관계도까지 만들어 군 이력 및 공탁금 조회를 요청하는 내용을 서면으로 보내고 총무성 산하 우정공사, 후꾸오카 사회보험센터에도 별도로 예?적금 조회 요청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 일본의 후생노동성 조사계는 신청인과 일본명 ‘남평순남’과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한국 관공서에서 발행한 서류를 요청하는 회신을 보내왔다. 나는 관공서에서 제적등본(사망한 사람의 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아 후생노동성으로 보냈다.

나는 필시 후생노동성이 보존한 자료를 찾았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후속 조치로 관계를 입증하는 서류를 요청한 것이라 생각했다.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은 매일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내며 행복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계에서 보내온 회신은 “보관된 자료에서 ‘남평순남’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회신을 주었다. 다른 기관의 회신도 마찬 가지였다.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일본에서는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무너지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많은 시간을 또 번민하면서 이제는 아버지가 포로생활을 했다는 러시아정부에서 직접 찾아보자 목표를 변경했다. 나는 2007년 외교부 본부 유라시아과에 ‘문순남의 노동증명서 발급요청’ 민원을 제기했다. 외교부는 나의 민원에 대해 러시아 한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알렸고 러시아 외교부 ‘한국과’에 협조를 요청했다. 1년이 넘어 외교부 주무과에서 연락이 있었다. 러시아 외교부는 한국 외교부에 “문순남이 포로로 수용된 지역과 수용소 번호를 알아야 찾을 수 있다. 그것을 찾아 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외교부 주무과에 연락을 취해 “그것을 찾아달라고 당국에 민원을 제기하고 요청한 것인데 한국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60년 전 소련에서 일어난 일을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느냐”고 호소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고민은 깊어졌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며 궁리했다.

과분하고 벅찬 일을 시작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래 전 기사를 보도했던 송광호 특파원을 찾기 위해 신문사 여러 곳과 언론인협회 등 이곳저곳에 연락해 물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강원일보에서 연락이 있었고 그분은 진작에 캐나다로 이민 가셨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강원일보는 내가 송 특파원을 찾는 딱한 소식을 접하고 여럿 원로언론인들께 근황을 물어 알려준 것이다.

어쨌든 외교부 본부, 주 러시아 한국대사관에 2년 정도 독촉해서 러시아외교부, 러시아 군사문서보관소에서 한국외교부로 보낸 공한 원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는 동안 한국 국가기록원이 러시아 공문서보관소와 계약에 의해 러시아정부가 보존하고 있는 조선인 포로명부를 200명 단위로 순차적으로 입수하는 계획을 알게 되었다. 국가기록원 특수기록관리과에 수없이 전화하고 떼를 써 아버지의 포로신상카드 2매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2009년 4월21일 러시아정부에서 비밀이 해제된 아버지 포로조사문서 사본 5부를 수령했다.

조사문서에는 아버지의 신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스물세 살 아버지가 기록한 문순남 자필서명이 들어있었다. 그걸 받아본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겠다고 나선지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나는 한국, 일본정부에서 찾지 못한 청년시절 아버지의 흔적을 마침내 러시아정부에서 보내온 문서로 온전히 만날 수 있었다.

문용식씨의 선친 문순남씨가 옛소련 ‘전쟁포로 및 수용자 관리본부’에서 작성한 자필 서명 ‘文順南’이 보인다. 이 문서는 수용소 석방을 앞둔 1948년 10월 26일 작성된 것으로, 문순남은 해방 직후부터 만 3년 2개월 이상 포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것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