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3돌-구소련 강제억류②] 조선인 6134명 이유도 없이 소련군에 체포

15일은 광복절 73주년과 대한민국정부수립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 36년의 질곡을 넘어 해방을 맞고 3년만에 (남한만의 단독이긴 하지만) 정부가 수립됐다.?독립을 얻고도 고국땅에 오지 못하고 연합국이던 소련에 억류됐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해 조국은,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시아엔>은 문순남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추적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살펴봤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가까운 경기도 김포(金浦)로 단신 피난했다. 그곳에서 다시 한국군을 다녀와 배후자를 만나 혼인하고 김포평야가 있는 마을에서 농사일에 종사했다. 아버지는 소련 체류사실로 늘 감시를 받고 살았다. 심지어 시도를 달리하는 이동 때는 경찰서 사찰계를 방문해 이동 허락을 받아야 했다.

냉전체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었다. 아버지에게 운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쟁 때문에 두 번이나 집을 떠나 고향의 가족들과 영영 만날 수 없었다. 1974년 봄 아버지는 한 많은 삶을 마감하셨다. 기침을 자주하고 몸이 아파도 형편상 병원에 갈수 없었기에 어떤 병명인지도 모른다. 상가에 갑자기 먼 거리에 있던 지서에서 경찰이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갔다. 마을에 초상은 늘 있는 일 이지만 사고사도 아닌 병사로 사망한 우리 집 상가에 경찰이 다녀가는 것이 의아하고 이상했다.

그 무렵 내 나이 15살, 동생들은 더욱 어렸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어린 자식들과 살아보려고 새벽에 10리가 넘는 거리의 공항시장까지 걸어나갔다. 버스를 갈아타고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 나가 플라스틱 생활용품을 사다가 머리에 이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상을 했다. 나는 형편상 다음 학년 교과서를 구입할 수 없어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학업을 포기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없었던 참담한 시기로 주변의 소개로 용산경찰서에서 후원하는 중학과정 직업소년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학교는 용산역 철길 옆에 운동장이 조그마한 단층 슬레이트 지붕이 있는 허름한 시설 이었다. 나와 비슷한 환경의 서울?경기 일원 청소년들이 배움에 대한 열망에 그곳을 다녔다. 선생님들은 학교로 들어오는 후원금을 통해 적은 보수를 받았지만 정규중학교 선생님 못지않게 가르침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셨다. 그 곳에서 중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했다.

나는 군에 다녀와 전자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종종 물었지만 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이 짧아 아이들에게 제대로 알려 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성향이 과묵하셨고 생전에 고향얘기 외에는 특별한 얘기를 해주신 것이 기억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한 미안함은 언젠가는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알아보고 흔적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95년 가을쯤 부산에 거주하는 작은 아버지댁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부산일보 광복 50주년 특집보도 ‘소련군에 체포된 조선인 포로 6,134명 명단 발굴’ 기사가 실린 일주일 분량 신문 뭉치를 얻게 되었다. 아버지의 막내 동생, 작은아버지 얘기로는 아버지 고향친구가 부산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그 신문을 주면서 당신이 신문에서 친구를 찾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며 자네가 형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분은 자신은 동경에서 복무하다 해방 후 돌아왔지만 자네 형은 만주로 갔는데 해방이 되고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모두 전쟁 가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49년 봄 갑자기 나타나 모두가 놀랬다고 했다. 그리고 소련에 가서 죽을 고생을 했다고 했다. 전해준 얘기는 구체적이고 그분이 실제 체험했던 일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내게 준 신문은 송광호 전 모스크바 특파원이 취재한 특집기사였다. 신문의 포로명단은 애초 일본식 발음을 러시아어로 기록한 문서에서 다시 일어로 옮겨 한글로 기록한 것이라 도무지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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