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3돌-구소련 강제억류③] 아버지 흔적찾기 10년 “국가란 무엇인가?”
15일은 광복절 73주년과 대한민국정부수립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 36년의 질곡을 넘어 해방을 맞고 3년만에 (남한만의 단독이긴 하지만) 정부가 수립됐다.?독립을 얻고도 고국땅에 오지 못하고 연합국이던 소련에 억류됐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해 조국은,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시아엔>은 문순남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추적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살펴봤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2001년 일제피해자 99명이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했던 “한일협정 외교문서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청구 소송’에서 법원은 2004년 2월13일 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외교부는 2005년 1월17일 청구권 문서 170여권 중 극히 일부인 5권을 공개했다. 그마저도 공개된 문서로 인해 정부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민심은 분노했고 정치권은 이를 모면하기 위해 졸속으로 ‘일제 강점하시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후속조치로 국무총리 산하에 ‘강제동원 진상조사 및 지원위원회’가 설립되며 피해접수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의 소련 체류사실을 접하고 10년이 지나 2005년부터 흔적을 찾기 위해 뛰어들었다. 시작은 신문에서부터 출발했다. 창씨 개명된 이름을 알 수 없었던 나로서는 신문의 그 많은 명단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고심 끝에 아버지가 귀국한 시점에 신문기사를 찾아보면 어떤 흔적이 남아있지 않겠나 생각되어 2005년 여름 무작정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갔다. 자료실에서 마이크로 필름에 기록된 1948~49년 기사를 검색해보니 다행히 49년1월 중순부터 2월초에 ‘소련에서 돌아온 괴청년들’에 관한 기사가 여럿 있었다. 기사는 그들이 북에서 남파한 공작원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대부분 남측으로 넘어오다 접경지역에서 붙잡혀 파주경찰서로 연행돼 조사받고 인천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고 했다. 나는 신문사를 가는 도중에도 무슨 자료가 제대로 있겠나 싶어 혹시 빈손으로 오는 것 아닌가 우려 했는데 자료실의 신문은 보존 상태도 좋았고 의외로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기분이 좋았다. 당시 신문은 한문과 한글이 혼용되어 있었고 한문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기사의 의미는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아버지의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겠다 생각하며 경찰청 정보국, 경기도경, 인천시경 정보관련 부서, 파주경찰서 등을 통해 아버지의 흔적을 탐문하고 찾아보려 애썼다. 그런데 정부기관 어디서도 아버지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기관에서는 “찾으려고 하는 자료가 오래된 고문서라 이미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었거나 정부 문서고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하지만 국가기록원에서 찾을 수 없다면 자체 폐기가 되었을 거”라 하였다. 국가기록원에는 이미 수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징용?징병된 조선인의 신상기록과 공탁금 기록 등 상당한 량의 자료가 일본정부에서 입수되어 전문가에 의해 번역되어 분류되고 전산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 전산 자료에 전쟁말기 입대한 아버지의 기록은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창씨개명 이름도 모르고 시작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병무청 민원을 통해 아버지가 1954년 1월부터 1958년 1월까지 육군 1사단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병적확인서를 발급받아 확인한 것이 유일했다. 그것을 알아내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어 관계자의 협조로 어렵게 찾은 것이다.
지금의 주민등록 체계는 1975년부터 시행되어 한해 전에 작고한 아버지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었다.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가는 과정은 시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무력감에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특집기사가 실린 신문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때 평소 지나쳤던 ‘삭풍회’(朔風會)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이지만 ‘삭풍회 회원들을 찾으면 아버지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문득 떠 올랐다. 그러면 ‘회원들은 어떻게 찾지?’ 그런 생각에 몰두하며 ‘혹시 외교부는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외교부 러시아과로 전화해서 삭풍회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직원이 나의 얘기를 듣고 삭풍회에서 제기한 민원을 담당했던 서기관을 연결시켜 주었다.
나는 서기관을 통해 삭풍회 5대 회장을 역임한 이병주(李炳柱)회장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마침 이회장께선 내가 거주하는 인천에 살고 계셨고 먼저 전화로 인사드리고 자택을 방문해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말씀드렸다. 일찍 작고하신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있는데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리고 지참했던 포로명단이 실린 신문을 보여드렸다. 이회장께선 신문 명단을 살펴보고 회원들과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셔 나는 신문을 드리고 돌아왔다.
당시 이회장께선 2005년 ‘일제 강점하시기 피해조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일제강제동원진상조사위원회’에서 고문으로 활동하셨다. 이회장께선 삭풍회 회원들과 명단을 살펴보시고 신문을 위원회에 기증했다.
나는 이병주 회장님과 자주 통화하고 회장님을 따라 종로의 한적한 다방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삭풍회 모임에 나갔다. 80대 중반의 노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회원의 소식에 마음 아파하곤 했다. 그리고 정부를 성토하고 원망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강제동원위원회는 전문가를 통해 신문명단을 번역하고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과정에서 ‘문순남’이 ‘미나미하라 주난’(남평순남, 南平順南)이라 개명된 것을 확인하고 나에게 연락을 주었다. 위원회는 모스크바 송광호 특파원이 보도한 광복절 50주년 특집기사가 지방을 대표하는 주요신문 ‘부산일보’ ‘매일신문’ ‘대전일보’ ‘광주일보’ ‘강원일보’에 여러 날 공동보도된 것을 알게 되었다. 각 신문은 기자가 애초에 제공한 기사를 토대로 형편에 따라 지면을 할애해 보도했다. 이런 이유로 신문사마다 개별 포로명단의 인적사항 열거가 조금씩 달랐다.
위원회는 아버지의 이력을 대전일보에서 보도한 기사를 통해 확인한 것이며 신문 포로명단에는 ①이름 미나미하라 주난 ②출생 1924년 ③출신지 까이오 세이코(경기도 개성) ④부대 130여단 776대대 ⑤체포일자 1945년 8월16일 ⑥체포장소 중국 선양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한국 전쟁 시 각기 피난해 살면서 남한에서 만났던 형제들에 의하면 고향에서는 일본식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 아마도 아버지는 ‘일본군에 입대하며 창씨개명 되었을 것’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