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3돌-구소련 강제억류⑤] 총리님, 장관님, 의원님 꼭 읽어보십시오

15일은 광복절 73주년과 대한민국정부수립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 36년의 질곡을 넘어 해방을 맞고 3년만에 (남한만의 단독이긴 하지만) 정부가 수립됐다.독립을 얻고도 고국땅에 오지 못하고 연합국이던 소련에 억류됐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해 조국은,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아시아엔>은 문순남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추적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살펴봤다. <편집자>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아래 내용 대부분은 국회에서 제정된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정부 국무총리산하 ‘일제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위원회’에서 발간한 ‘진상보고서’ 내용이다.

내가 이 진상 보고서를 입수하는 과정도 참 답답하고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이런 진상조사보고서 자체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위원회 홈페이지 자료실에도 등재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조사보고서에 대해 들은 것은 2014년 11월6일이다. 일본 전후보상연대의 아리미스겐 대표와 소통 중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많은 피해자와 국민들은 세금으로 만든 이 보고서가 있는지조차 모르리라 생각된다. 나는 위원회에 “어찌 이 보고서가 출간한 이후 당사자들도 모르는데 일본에는 어떻게 전해졌느냐”고 따졌다. 강력히 항의한 끝에야 보고서 2권을 인수했다.

나는 국가가 왜 그토록 오랜 시간 ‘시베리아 억류문제’를 회피했는지 그게 너무 궁금하다. 정말 이래서는 안된다. 이보다 훨씬 어려운 일도 슬기롭게 헤쳐나온 대한민국이 왜 시베리아 억류문제는 방치하는 지 그게 답답하다.

이것을 보면 일제하 징병으로 끌려갔던 내 아버지 문순남과 삭풍회 어르신들의 삶을 왜곡시킨 배경과 사실들이 자세히 나온다.??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중 삭풍회 어르신들을 만났다. 짧은 지식이나마 아버지와 그들의 행적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이었다.

아래 자료들을 정부와 국회에 계신 분, 학문연구를 하시는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주권을 빼앗기고 국민과 강역을 잃었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다.(끝)

1.억류배경

일·소 관계와 중일전쟁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일본에 완전히 빼앗겼다.

일본은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만주와 몽고가 언제나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한다.

만주를 점령한 군부의 자신감은 37년 중일전쟁 도발로 이어지고 전선을 중국 전체로 확대했다. 중국과의 전쟁 시 필요한 물자조달을 위해 동남아와 남양군도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의 패권을 두고 미국과 충돌하며 태평양전쟁까지 일으켰다.

소련의 참전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45년 2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얄타에서 만나 독일에 대해 분할점령원칙을 세우고 군수산업을 폐쇄 또는 몰수하며 주요 전범을 국제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담에서 극동에 대해서는 별도의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는데 소련이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료된 후 3개월 이내 對日戰에 참전하며 연합국은 대가로 과거 러일전쟁에서 잃은 소련의 영토를 반환하고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45년 7월26일 미·영·중 3국 수뇌가 포츠담에 모여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일본이 거부하자 미국은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참전을 망설이던 소련은 원폭이 투하되자 8월8일 이 선언문에 서명하고 8월9일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유럽에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병력을 투입해 북위 38도 북쪽의 북한, 만주, 사할린, 쿠릴열도 등을 무력 침공하며 일본 군인, 군속 64만명을 무장해제하고 포로로 잡았다. 이중 1만여명이 조선출신이며 일본은 8월14일 포츠담선언문 13개 조항을 무조건 수락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시베리아 억류

본토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전세가 무너진 상황에서 관동군 방어지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관동군 부대는 소련군에 무장해제됐다.

소련은 러?일전쟁 참패의 치욕을 복수하고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다.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갈지 모를 만주, 한반도 북부, 사할린과 쿠릴열도 일대에 대해 일본의 전후처리 방침을 보여주는 두 가지 자료가 있다.

하나는 패전직전 교전 중이던 미·영에 대한 평화교섭의 중개를 소련에 요청한 ‘화평교섭요강’이다. 천황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된 고노에 후미마로가 작성한 것으로 주요 내용은 천황제와 고유영토 유지를 전제로 만주일대에 주둔한 관동군, 민간인의 억류와 노역제공에 동의한다는 조건이 담겨있다. 이 교섭은 소련 수뇌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아이디어를 스탈린이 이용했을 개연성이 높다.

또 하나는 관동군이 무장해제될 즈음 작성된 일본 대본영 아사에다 참모의 ‘실사보고’ 등 일련의 관동군 주요문서다. 이 문서에서도 군수뇌들은 본토의 안녕을 위해 스스로 나서서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과 민간인을 그대로 잔류시켜 필요한 부분에 종사시키도록 부탁했다.

2.억류과정 및 실태

스탈린은 일본군 포로들에 대해 8월23일 국가방위위원회명령(9898호)을 내려 극비리에 소련연방 각지의 수용소로 이송했다. 포로와 관련된 모든 사항과 문서는 철저히 비밀로 취급되었고 국가방위위원회 명령에 의거 “극동과 시베리아의 환경에서 노동할 수 있는 신체를 지닌 일본군 50만명을 선발”한다.

포로들이 억류되는 과정에서 일본군 지휘관들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은 채 소속부대 명부를 소련군에 넘겼고 조선인들을 귀국시켜야 한다는 방침을 알고 있었음에도 방치한 소련당국의 무성의와 국제사회의 무관심도 그들을 비극으로 몰아놓은 원인이 되었다.

수용소는 소련연방 전역에 2000여개에 달했다. 포로는 지역마다 1000명 단위로 건설대대를 구성해 노동현장에 투입하고 북으로는 북극권(나리리스크 등), 남으로는 카스피해 주변에서 중앙아시아 남부, 서쪽으로는 모스크바 근교의 도시지역까지 소련 전역에 걸쳐 있었고 대부분의 수용소는 시베리아에 분포하며 전체 포로의 80%가 이곳에 수용되었다.

전시 일본군으로부터 획득한 전리품으로 동, 하절기 제복, 침구류, 내의 등을 지급하고 개인별 일일 목표 노동량을 분배해 성과에 따라 여가와 배식 등을 차별화했다.

3.귀환 및 정착

귀환 과정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에 포함된 1만여명의 조선인 억류자중 7천여명은 조선인 신분이 밝혀져 비교적 조기에 풀려났다. 소련 각지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3천여명의 조선인 출신 포로들은 소련 극동에 위치한 하바롭스크 지역 380수용소에 집결해 48년 12월19일 석방되고 나호트카항에서 저녁에 화물선을 타고 다음날 아침 북한지역 흥남으로 귀환했다.

만주출신 조선인 1300여명과 북한출신 800여명은 조기에 석방되고 남한 출신은 흥남여고 임시수용소에서 약 2개월 가량 머물며 조사를 받았다. 49년 2월초부터 남한출신 500여명은 여러 조로 나뉘어 열차로 38선 인근까지 이동 후 북측지역에서 도보로 남한으로 귀환했다. 그들 대부분이 접경지역 경비초소와 군과 경찰에 체포되었고 인천 송현동에 위치한 전재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국내정착 과정

전후 냉전 상황은 천신만고 끝에 조국에 돌아온 청년들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었고 뜻하지 않은 고난을 주었다. 또다시 인천수용소에 수용되어 한·미 방첩기관의 엄중한 조사를 받아야 했고 49년 3월26일 마침내 고향으로 출발했다.

귀향 후 적성국 체류사실은 요시찰 인물로 관리되어 경찰 등 사찰기관의 감시를 받고 살아야 했다. 시·도를 달리하는 이동 시 경찰서를 방문해 이동목적을 밝히고 승인을 받아 이동해야 하는 신분상의 제약이 따랐다..

반공국가가 되어버린 조국에서 사회적 냉대와 핍박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데 익숙하게 되었고 가족에게조차 젊은 날 과거의 일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냉전의 피해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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