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의 선시조⑧] 어느 무명 가수 생애를 떠올리며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지난 5월 26일 오후 열반하신 조오현 큰스님의 열반송입니다. 평생을 구도자로서, 시조시인으로서,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따뜻한 이웃으로 생을 살아온 오현 큰스님. ‘아득한 성자’ ‘인천만 낙조’ ‘침목’ 등 숱한 애송시를 남긴 그의 문학적 성취를 배우식 시인의 연구를 통해 돌아봅니다. <편집자>

[아시아엔=배우식 시인] 파격의 형식은 일반적 시조의 격식을 크게 뛰어넘는 조오현만의 창조적 형식이다. ‘파격(破格)의 형식’에서는 정격에서 찾을 수 있는 균제미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 변격의 형식보다도 훨씬 파격적인 형식과 역동적인 언어를 보여준다.

조오현은 시조의 단성적 어조와 평면적 진술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적 실험에 착안한다. 그의 시조의 언어는 통일적이고도 규범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그 파격의 미를 자랑하며, 이런 파격은 모든 언어의 가능성과 그 의미의 외연을 확대시키기 위한 시적 고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격식을 깨치면서 언어는 요동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자리하여 끊임없이 탈중심화를 꿈꾼다.

조오현은 다성적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사설로 쓴 선시조와 기타 선시조에서 시조의 형태적 고정성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형식미를 보여준다. 이 파격의 형식은 시적 정황 자체를 정적인 데에서 동적인 것으로 끌어간다. 조오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관념적이고도 고정적인 시조의 형식을 초월하면서, 그 형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형식을 해체하여 새로운 선시조의 시조 형식을 창조한다. 바로 ‘파격의 형식’이다.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

늙은 중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어주고 꾸벅, 절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산마을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도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전문

부음을 받는 날은

내가 죽어보는 날이다.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

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나에게 꽃을 던지는 사람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

아직도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화장장 아궁이와 푸른 연기

뼛가루도 뿌려본다.

―「내가 죽어 보는 날」 전문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 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인 머리 풀고 상여잡고 곡하기를 “보이소 보이소 불길 같은 노염이라고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는데요 죽은 김 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옹기로 옹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데요.

―「무설설(無說說) 1」 전문

시조는 “언제나 시적 주체의 서정적 진술에 의존하므로, 단성적(單聲的) 어조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평시조의 고정적 율격체계를 파괴하려는 경향은 사설시조에서 나타난다. 사설시조는 시조의 형태적 고정성을 지키면서도 그 형식적 고정성을 파괴하는 부분이 결합하여 나타난다. ①에서는 시적 주체인 ‘나’의 목소리가 아닌 “늙은 중님”하고 부르는 “예닐곱 아이‘의 목소리를 끼워넣는 시적 장치를 통해 파격의 형식을 보여준다. ②의 사설시조 중장의 배열은 일반적인 사설시조와는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그 언술의 공간 안에서 시적 주체와 동일화 되어 함께 생각하게 만드는 형식을 취한다. ③의 사설시조 역시 ①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보이소 보이소 불길 같은 노염이라고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라고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인 머리 풀고 상여잡고 곡하며 말하는 것과 “내 노염은 옹기로 옹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라며 죽은 김 영감 답하는 몇 개의 목소리 끼어들어 작품 안의 공간에 참여한다.

그가 시조의 시적 형식 속에 끌어들이고 있는 말은 다른 말과 대화적 관계를 맺으면서 그 형태적 구체성을 획득하여 새로운 시적 형식으로 발전하여 시조의 격조를 뛰어넘는 ’파격의 형식‘을 형성한다.

철옹성의 빗장보다 굳게 닫힌

관문(關門)

관문

관문

무슨 포교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 모두 다 불러놓고 점검하는 고함소리

―「흠산삼관―만인고칙 13」 전문

어그러뜨리다 어그러뜨리다 어그러뜨리다

어스름 달밤 조개류 젓갈류 어스름 달밤 조개루 젓갈류

그렇다 짠 음식이다 오늘 저녁 고두밥이다.

―「쇠뿔에 걸린 어스름 달빛」 전문

④의 작품은 초장의 넷째 음보에서 “관문(關門)/관문/관문”의 3행으로 행갈이를 달리하여 표현한다. 시조 한 수는 작품의 형식과 의미를 심화하기 위해 1행에서 6행 혹은 십수 행까지도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관문(關門)은 ‘흠산문수(欽山文邃)’에게 양(良) 선객이 ‘화살’ 하나로 관문 셋을 뚫었는데, 어떻습니까?’라는 물음에서 나온 말이다. 화살은 마음을 상징하는데 이 ‘관문’은 깨달음의 문이며 세 관문을 뚫어야 비로소 ‘화두’를 깨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형식적 장치를 통해 수행 혹은 깨달음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음보의 길이가 늘어남에도 ‘관문’을 3행으로 행갈이를 달리하여 표현한다. 의미의 심화를 위해서 이런 파격적인 형식을 만들어낸다.

⑤의 작품의 초장 “어그러뜨리다 어그러뜨리다 어그러뜨리다”는 3음보처럼 보이지만 실제적 율독 음보는 4음보이다. 시간적 등장성에 근거하고 있는 음보의 운용 때문이다. 시조의 형식적 양상이 ‘음보’의 운용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는데 “어그러뜨리다 어그러뜨리다 어그러뜨리다”라고 표현하여 시조 형식의 고정성을 ‘어그러뜨’려 새롭고도 파격적인 시형을 창출하려는 심층적 의도를 조각처럼 새겨놓고 있다.

지난 주말 한 노인이 하룻밤 쉬어가면서

세상은

곤충의 날개 표면 부챗살처럼

뻗어 있는 줄이라 한다

뜸쑥을 낸 몸 경혈에

놓고

발그족한 배꼽

―「주말의 낙필(落筆)」 전문

⑥은 중장이 6음보로 이루어진 시형으로서 엇시조 형식의 선시조이다. 음보수가 늘어난 중장을 한 줄로 이어서 쓰지 않고 “세상은/곤충의 날개 표면 부챗살처럼/뻗어 있는 줄이라 한다”라고 행갈이를 달리하여 표현한다. 더군다니 종장의 표현은 돌발적이고 파격적이다.

언제부터인가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어쩌다 늙은이들만 오랜만이라고 만져보고 간다

내가 본

지금 나의 면목은

녹슨 축음기

산에서나 들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 소리 듣고 ―

별이 뜨는 밤이거나 뜨지 않는 밤이거나

― 소리 듣고 ―

날 닮은 나뭇가지들 다 휘어지고 다 부러졌지

이제 내 소리 듣고 흉내 낼 새도 없고

이제 내 소리 듣고 맛들 열매도 없다

이제는 내가 나를 멀리 내다버릴 수밖에

―「축음기 – 일제하 어느 무명 가수 생애를 떠올리며 」 전문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 논두렁 밟고 서면 ―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 가을 들 바라보면 ―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똑바로 서서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허수아비」 전문

⑦과 ⑧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것은 장과 장 사이에 앞뒤에 줄표를 넣어 문장을 삽입한 것이다. 줄표문장 안에서 앞의 내용을 부연하거나 언어를 끼워 넣은 이런 형식의 시조는 매우 특이하고 파격적이다. ⑦의 둘째 수에서 “― 소리 듣고 ―”의 반복과 ⑧의 둘째 수 “ ― 논두렁 밟고 서면 ―”, “― 가을 들 바라보면 ―”은 앞의 내용을 부연하는 효과 외에 리듬감을 살리는 효과가 있다. 연시조 형식의 고정적인 형식을 넘어서서 해체적 실험으로 새로운 시조 시형을 파격적으로 창출해 낸 이런 선시조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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