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 난민수용소에서 떠올린 ‘몰개월의 새’ 1] 라브리오에서 다시 만난 그리운 이름과 아픈 기억들

최근 중동에선 터키의 쿠르드족 소탕전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쿠르드족이 어떤 민족이길래 터키가 이토록 열을 올리고 있는가?

아리안계 인종인 이들은 이란, 이라크, 터키 등지에서 거주하는 약 4,000만 명의 유랑민족이다. 쿠르드족은 약 4,000년 전 현 터키 남동부와 이란-이라크-시리아 국경지역에 해당하는 쿠르디스탄에서 거주했다. 중세 이후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제국이 1차대전에서 패한 후 이들에게도 암운이 드리워졌다. 승전국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4개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1920년 강대국은 쿠르드족에 자치권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고, 독립과 자치권을 향한 쿠르드의 열망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1927년 쿠르드족은 터키 동부에 아라라트 공화국을 세웠으나 3년 만에 터키의 침공으로 멸망했으며, 1946년 이란에 거주했던 쿠르드족이 세운 마하바드 공화국도 이란의 공격을 받아 소멸했다. 이후에도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이란 3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가장 최근인 2017년 9월만해도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가 독립투표를 실시해 91.8%의 찬성표를 얻었지만, 이라크를 비롯한 인접국들의 반대로 독립이 어려워 보인다.

쿠르드족 중 가장 많은 약 1,500만 명이 살고 있는 터키. 터키의 쿠르드족 대다수는 정부의 차별정책과 탄압을 견디며 생존해 왔다. 독립을 주장해온 쿠르드인들이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을 세워 투쟁에 나섰지만, 터키-쿠르드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결국 수많은 쿠르드인들은 고향을 등지고 이웃나라 그리스로 떠나야만 했다. 10여년에 걸쳐 20여차례 터키를 방문하며 쿠르드족의 실상을 알려온 이신석 <매거진 N> 분쟁지역 순회특파원. 그가 2017년 12월 중순 터키 쿠르드 난민의 자취가 묻어있는 그리스로 향했다. -편집자

[아시아엔=이신석 분쟁지역 순회특파원] 아테네를 처음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우버 택시 운전사 화니스에게 연락해 라브리오라는 곳으로 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25년 동안 태권도를 해온 그는 왼쪽 팔뚝에 ‘태권도’라는 한글 문신을 새길 정도로 태권도를 사랑하는 그리스인이다.

그의 차를 타고 아테네에서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라브리오로 향했다.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이 펼쳐진 그리스의 전형적인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해안을 낀 작은 도시에 들어섰다. 라브리오와 키섬 사이엔 폐허가 된 건물들이 남아있는 섬이 하나 있다. 그 섬이 바로 마크로니소스 섬이자 그리스의 ‘알카트라즈’(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형무소로 쓰였던 섬)다. 화니스는 바다 건너 보이는 섬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마크로니소스라는 이름의 섬은 예전에는 헬레네라고 불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속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된 헬레네를 파리스 왕자가 납치해 그 섬에 있는 동굴에 가두어 둔 것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1912년 타이타닉 호의 자매 격인 브리타닉호가 침몰한 곳이 바로 마크로니소스와 키 섬 사이의 해협이기도 하다.

마크로니소스, 그리스의 ‘알카트라즈’
마크로니소스 섬에는 감옥이 하나 있었으나, 중죄인이나 살인자가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감옥에선 그리스 내전부터 1974년 군사정권의 몰락 후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정치범들을 투옥하고 고문, 살해당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이 정치적 신념이 다르단 이유로 동포에게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던 곳이었다.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했을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그리스 레지스탕스들은 전역에서 독일 점령군을 괴롭혔다. 1944년 10월, 독일군은 마침내 그리스에서 철수했다. 그리스 해방 초기엔 좌파가 우세했으나, 우파인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미국, 영국, 소련의 얄타 회담에서 유럽의 세력을 나눌 때 그리스는 공산주의 영향권에 남겨 놓지 않기로 이미 합의가 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나치를 상대로 싸운 레지스탕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정치 체제가 왼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서방의 지도자들에게는 불편했던 것일까. 영국 윈스턴 처칠의 명령으로 스코비 장군은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궁리를 했고, 결국 이들을 정부 요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1944년 10월 3일 신타그마 광장에선 이에 항의하는 평화집회가 열렸는데, 이때 경찰의 사격으로 무고한 시민이 사망했다. 이는 이듬해 1월 5일까지 지속된 12월 봉기, 즉 데켐브리아나가 촉발된 계기가 되었다.

1945년 2월 바르키자 조약으로 득세한 극우파 군부는 사실 나치의 협력자였다.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레지스탕스 세력과 가족들을 끝까지 추적했다. 바르키자 이후 우파가 좌파에게 저지른 만행은 나치의 그것에 필적할 만했다. 1,298명이 살해되었고 31,632명이 고문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몰수 당하거나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46년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대전 후 재건에 집중하는 동안 그리스는 내란을 겪으며 비극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그리스 공산당(KKE),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과 같은 좌파 세력은 정계에서 퇴출되어 군부 재판소에 세워졌다.

1946년 소포울리스 수상은 ‘나쁜’ 그리스 인을 모범시민으로 교화시킨다는 명분 아래 공산주의자들을 마크로니소스 섬으로 보냈다. 그들은 독일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였지만 반역자 혹은 국가의 적 취급을 받았다. 그들의 갱생은 ‘실로암의 세례’라고 불렸다. 그들은 혹한기와 혹서기에 텐트에서 생활해야 했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뎌야 했으며, 독방에 감금되기도 했다.

세뇌까지 당한 이들은 너무나 피폐해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서약서에 서명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전선에 보내져 자신의 동료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했다. 사인을 거부한 사람들은 끝없는 고문을 당하거나 군부재판에 보내져서 총살을 당하곤 했다. 이는 1949년 그리스 내란이 끝나고 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공산주의자들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마크로니소스는 이제 버려진 섬에 불과하다. 반세기 전에 자행된 고문과 잔혹행위는 그 곳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머리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그리스의 섬 하면 휴양지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마크로니소스는 인간의 잔혹성이 지중해의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폴란드나 독일의 집단수용소처럼 마크로니소스 섬도 대중에게 공개해 그 치부를 드러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마크로니소스의 역사가 고대 이 섬이 지녔던 의미와 맞물린다는 것이 서글프다. 마크로니소스는 고대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아름다운 헬레네가 갇혀 있었던 곳이었지만, 근대 그리스에선 국가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이들이 갇혀 있었던 있었던 곳이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 입니다.” -볼테르

필자와 화니스는 어느덧 라브리오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난민 수용소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해 주민에게 길을 물어 보기로 했다. 화니스는 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 앞에 차를 멈추었다.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면 모른 척 했거나 “내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의 답이 돌아왔을텐데 젊은 여성에게 물어 정확하게 답을 얻는 것을 보니 화니스는 영리하고 상황 판단이 빨랐다.

담벼락에 쓰여진 PKK. 쿠르드 저항을 상징하는 이 세 글자가 나를 흥분케 만들었다.

알려 준 길을 따라가니 1960~70년대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회색 빛 콘크리트의 낡은 건물이 보였다. 정문의 벽에 PKK라고 페인트로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은 느긋해져 있던 몸과 마음이 긴장이 되고 가슴 깊은 곳의 울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울림은 나로 하여금 기억 저편을 떠올리게 했고, 또 무릎 꿇게 만들었다.

건물의 정문에는 경찰이나 경비가 서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출입이 가능해 보이지도 않았다. 문 앞에 몇몇이 서 있었는데, 그 중 중년의 사내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내 아래 위를 훑어 보았다. “혹시 이 곳에 쿠르드 사람들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그가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 쿠르드인이라고 대답했다. 터키에서 온 쿠르드인도 있냐고 묻자 그 중 젊은 친구가 “터키에서 왔다”고 했다.

“디야르바키르? 마르딘? 실로피?”를 대며 터키 어디서 왔는지 재차 묻자 그는 놀랍게도 지즈레(Cizre)라고 했다. 지즈레라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쿵쾅 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나고자 했던 그들이 눈 앞에 서 있었지만 격해진 감동을 눌렀다. 휴대폰을 꺼내 지즈레에서 사귀었던 쿠르드족 친구들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는 사진 속 한 사람을 가리키며 자신의 친구라고 했다. 필자가 가장 아끼는 쿠르드인 친구였다. 광인의 눈빛을 가진 그는 눈에 띄는 외모와 행동으로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사내다.

수용소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대리석의 계단. 이 계단을 오르며 터키 동부 하카리의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되어 짐승몰이 하듯 올라가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지만 같이 아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워 서로를 끌어안고 즐거워했다. 그는 내게 “밥은 먹었냐”고 묻고는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곁눈질로 보니 PKK의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 PKK, 쿠르드민병대(YPG), 쿠르드 인민민주당(HDP)의 사진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너무나 낯이 익은 사진들.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희노애락의 순간들이 오버랩 되었다. 이윽고 터키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반라의 상태로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짐승처럼 올라간 숨가빴던 계단이 떠올랐다.

2층침대 4대와 사물함 8대가 배치돼 있는 방. 사물함은 그리스적십자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2017년 12월 중순 방문했을 당시 이들은 “외부의 지원이 5개월 전(7월) 끊기고 전원 퇴거 명령도 떨어져 경제적 궁핍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지즈레 친구는 외부인에게 쉽게 공개하지 않는 ‘그들의 방’을 서슴없이 열어줬다. 방안에는 2층침대 4대와 개인사물함들이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는 문에는 압둘라 오잘란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걸려있었다. 방에 있던 다른 쿠르드인들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인사를 나눴다.

중간 중간 터키어를 섞어 말하며 그들의 출신 지역을 물어 보았다. 필자가 지난 10여년간 20여차례 터키를 드나들며 가보았던 쿠르드의 도시여서 더욱 반가웠다. 그들에게 터키에서 찍은 사진들과 하카리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며 직접 서명했던 서류를 보여줬다. 그간의 경험을 공유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피를 나눈 동지 같아졌다. 대략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들은 필자를 큰형님으로 대해줬다.

소박하게 차려진 아침식사. 올리브와 차, 빵에 치즈와 토마토를 섞은 즉석요리를 함께 즐겼다.

곧이어 소박하게 차려진 아침식사가 나왔다. 식사 후 동생들처럼 친해진 그들에게 편한 자세로 차이(Chai)를 달라고 하자 다들 큰소리로 웃었다. 방에는 침대와 사물함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물어 보니 TV가 있는 방도 간혹 있지만 자신들의 방에는 없다고 했다. 마침 필자의 지인이 딸이 쓰던 거라며 줬던 맥북이 생각났다. 좋아하는 축구를 시청할 수 있고 다른 작업도 할 수 있으니 내일 가져다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 주머니를 털어보니 벨트 안쪽에 숨겨 놓은 비상금을 제외하고 400 유로 정도가 있었다. 그들에게 내어 놓으며 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현금일테니 8명이서 나누어 가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은 받을 수 없다며 만류했다. 그 중에서도 터키교도소에서 6개월간 수감되어 있었다는 친구가 앞장 서 필자를 말리니 나머지 친구들도 그에 따랐다. 형으로서 동생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하니 꼭 그렇게 하고 싶다면 자신들은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에 매니저에서 전해달라고 했다. 자신들은 현금이 필요 없다면서. 고결한 품성과 이상이 젊은 그들을 이 곳으로 인도했으리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 상황을 모른 채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화니스가 생각났다. 내일 다시 오겠노라며 그들 모두와 일일히 포옹을 하고 양 볼을 맞대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아래층으로 내려 오는 길에 양해를 구하고 오잘란과 PKK등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래 층 홀에는 다른 쿠르드인들도 있었다. 그 중 테헤란에서 왔다는 청년이 유창한 영어로 통역해줘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들어온 중년의 쿠르드인이 정색을 하며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리의 친구라며 괜찮다고 하자 다시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건물을 나섰다.

태권도 보이 화니스. 태권도 정신으로 살아가는 화니스는 그 자랑스런 마음을 간직하고자 팔뚝에 태권도 문신을 새겨 넣었다. 화니스는 모든 상황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의리 있는 그리스 친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니스는 지나가던 동네 주민들이 “당신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고 했다. 친구가 난민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기다린다고 하니 “경찰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맞은 편 건물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출입자는 물론 난민들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 속히 이 곳을 떠나라”는 충고를 해줬다고 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든든하게 뒤를 봐 주고 있던 ‘태권도 보이’는 정말 고마운 친구가 아닐 수 없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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