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적군 묘지에서 6.25를 떠올리다···구상 ‘초토의 시’

구상(具常) 시인 <사진=칠곡군 홈페이지>

[아시아엔=김창수 시인] 구상(具常, 1919- ) 시인은 서울에서 나 함남 원산에서 성장했다. 월남하여 6.25때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카톨릭 영성을 바탕으로 구도자적 경향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시집으로는 <초토의 시> 등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많은 학자들은 전쟁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줄기차게 상호의 주장을 피력해 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 일월총서)을 쓴 부르스 커밍스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느냐의 문제보다는 서로 간의 화해에 중점을 뒀던 것처럼 한국전쟁도 기원의 문제보다는 화해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모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뿐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일의 길에서 결정적 변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 구상은 ‘초토의 시’, 라는 15편의 연작시를 발표한다. 그의 ‘초토의 시’는 조국의 분단현실에 대한 통한과 간절한 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다. 초토(焦土)는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으로 시에서는 6.25 전쟁 이후의 비극적인 상황을 나타낸다.

그 중에 8번은 ‘적군 묘지에서’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 시에서 그에게 적군은 이렇게 이해된다. 적군이라고 함은 어쩔 수 없는 남북의 이분법적 구분에 의한 것일 뿐 시인에게는 적과 아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한 동포일 뿐, 애잔한 민족사의 희생양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한 핏줄의 의식이 깔려 있다.

시는 “줄지어 눈도 감지 못하고 누워 있는” 가련한 이 땅의 젊은이들의 주검을 “양지 바른 곳에 파묻어 주는” 동족애를 물씬 풍기고 있다.

시인은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三十) 리,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 을 두고서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울어 버린다. 아마 무덤에 묻힌 이들도 시인과 같이 통곡을 했을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니 남과 북이 자신의 주장을 죽이고 상대방의 의견을 살리면 미움과 사랑도 넘어설 수 있을 터인데… 그러면 그 끝에 통일이 있지 않을까?

초토의 시

-적군 묘지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버린다.

구상, <초토의 시>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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