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형제단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s)’은 어떤 단체?

하산 알 반나(1906~1949)

1928년 이집트에서 등장한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사회운동 단체이자 가장 역사가 깊고 가장 강력한 단체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슬림 형제단을 위해 살고 또 무슬림 형제단을 위해서 죽었지만 그 중에서도 무슬림 형제단을 창설한 하산 알 반나(Hassan Al-Banna, 1906~1949)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단체로 출발한 ‘무슬림 형제단’, 아랍 전반에 영향력

하산 알 반나는 이집트 북쪽 알렉산드리아 근처 마흐무디야(Mahmudiyya)에서 태어났다. 다르 알울룸(Dar al-Ulum) 교육대학(현재 카이로 대학의 전신)을 졸업한 후 여러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특히 수에즈 운하 근처 이스말리아(Ismalia)에 오래 있었다. 처음에는 이슬람 개혁가인 모하메드 라시드 리다(Mohammed Rashid Rida)의 가르침을 따랐으나 1928년 자신이 직접 단체를 세우고 무슬림 형제단이라 명명하기에 이른다.

무슬림 형제단은 원래 종교적인 가르침을 설파하는 단체로 출발했으나 1932년 이스말리아에서 카이로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정치적인 움직임으로까지 확산됐다. 순결한 이슬람 위에 이집트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자는 하산 알 반나의 외침은 곧 도시 중산층과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인근 아랍 국가로 무슬림 형제단 정신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산 알 반나는 그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알 이크완 알 무슬리문(al-Ikhwan al-Muslimun)이라는 일간지까지 창간하게 된다.

1947년, 유엔(United Nation)에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를 설치한 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가장 맹렬히 이에 반대하는 단체가 되는데 시오니즘을 반대하는 조직을 편성하면서까지 저항하기에 이른다. 무슬림 형제단이 계속 성장하는 동시에 단체의 성격이 과격해지고 테러까지 감행하자 이집트 정부는 팔레스타인 전쟁(Palestine War) 당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슬림 형제단의 자금 동결, 지부 폐쇄, 주도자 색출 등 다양한 방법으로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했다.

파미 알 누크라시 총리와 자리한 파루크 이집트 국왕(오른쪽)

“피의 복수”···’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국무총리 암살, 정부는 창설자 제거

그러던 중 1948년 12월, 당시 이집트 국무총리 파미 알 누크라시(Fahmi al-Nuqrashi)를 무슬림 형제단 소속의 한 청년이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이집트 정부는 비밀 경찰을 동원해 이듬해인 1949년 2월, 무슬림 형제단 창설자 하산 알 반나를 제거한다.

이에 앞서 1948년 11월, 지금도 사람들 기억 속에 ‘지프차 사건(Jeep Case)’이라고 회자되는 일이 발생했다. 어느 무슬림 형제단 소속 군인의 지프차 속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이집트 사회의 안녕을 어지럽히기 위해서 테러를 한다는 내용의 서류 뭉치와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이 사건은 곧 이집트 정부에게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할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되었고 정부는 1948년 12월 6일, 무슬림 형제단 해체를 명령한다. 하지만 지프차 사건에 연루된 관련자들에 대한 법정공방이 2년간 지루하게 이어지는데 증거품 중 일부가 조작이 된 게 밝혀지고 연루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9년 2월, 하산 알 반나가 비명횡사한 후, 하산 알 반나의 연설과 그가 쓴 기사들, 그리고 그의 단상들은 무드하키라트 알 다와 알 디아야(Mudhakkirat al-da’wa wa al-di’aya) 라는 책으로 엮어져 출간됐다. 그는 글과 말에 능한 달변가였을 뿐만 아니라 비리가 만연한 정치세계에서 홀로 청렴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무지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고지식함으로 인해 하산 알 반나 시절에는 무슬림 형제단이 크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검은 토요일’ 사건 이후 나세르 시대 시작

1952년 1월 26일, ‘검은 토요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터진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도심지 한복판에서 건물이 폭파된 사건인데 유럽인들이 건물주로 있는 건물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날에는 50명으로 이루어진 영국 군대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집트 수도 한가운데서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이집트 정부의 치안 능력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이에 파루크 왕은 치안 부재에 대한 책임을 물어 와프드당의 해산을 명령하고 왕궁 공무원들로 임시 내각을 구성했다. 누가 검은 토요일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무슬림 형제단이 시작했다는 설도 있고 이집트 사회당이 주도했다는 설도 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겨우 6개월 후, 임시내각을 구성했던 파루크 왕은 쿠데타로 폐위되고 나세르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나세르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한 무슬림 형제단은 왕정 붕괴 이후 햇빛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1954년 세속주의 공화국을 세우려는 나세르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면서 누크라시 국무총리 암살 때처럼 다시 한 번 불법단체로 규정된다. 또 한번 탄압이 시작됐지만 오히려 무슬림 형제단은 지하 세력 확장을 통해 더욱 더 결속력을 다졌으며 이집트 국경 밖 전 아랍 세계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과격해진 무슬림 형제단, ‘영화상영’도 반대

사회주의 세속정부의 탄압으로 과격해지기 시작한 무슬림 형제단은 카이로를 거점으로 삼으면서 생활 전반에 걸쳐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는데 일례로 영화상영을 반대하기도 했다. 사실 이집트에서 근대식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 것은 1904년의 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이집트 최초의 영화관이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 세워졌고 뒤이어 발발한 세계대전 당시 유입된 영국 군인들은 유럽과 미국의 문물을 이집트에 소개하는 데 알게 모르게 큰 공을 세우게 된다. 1917년에는 알렉산드리아에 영화 제작소가 생기게 되고 1925년에는 이집트 자체 제작 영화 4편이 개봉됐다.

1934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스튜디오 미스르(Studio Misr)라는 거대 아랍 영화 자본이 조성되고 이집트 각 지역의 도시는 물로 아랍 세계 전체에서 영화 산업은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이집트 영화가 다른 나라로 수출됨은 물론, 1936년에는 이집트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을 정도로 이집트는 일찌감치 영화 산업이 발달했다.

그런데 이런 이집트 영화산업에 무슬림 형제단이 손을 대려고 한 것이다. 무슬림 형제단을 위시한 다른 보수 세력들은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이유를 대며 영화 검열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


나세르, 비밀결사대 ‘자유장교단’ 조직해 무혈 쿠데타 일으켜

1952년 혁명을 준비하며 나세르는 파루크 왕정을 몰아내려고 ‘자유장교단(Free Officers)’이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했는데 자유장교단 소속 군인들은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장교단과 무슬림 형제단 사이에는 서로간에 긴밀한 교류가 있었고 이들의 혁명은 결국 무혈 쿠데타로 성공을 거뒀다.

자유장교단의 창립 멤버는 쿠데타 후에 권력을 잡은 나세르, 하산 이브라힘(Hassan Ibrahim), 칼리드 무히 알딘(Khalid Muhyi al-Din) 등이며 후에 나세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안와르 알 사다트(Anwar al-Sadat) 등이 합류했다.

1952년 혁명 이후 무슬림 형제단이 상당수 가입되어 있던 이집트변호사협회는 독립성을 인정받게 되는데 나세르 대통령은 법조인을 비전이 없는 직업으로 보았지만 사다트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적극적으로 법조인을 그의 내각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변호사협회가 사다트의 정책을 반대하는 야당 클럽으로 변한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는 것에 변호사협회의 반대가 심하자 사다트 대통령은 1981년 개각 때 변호사협회 출신 중 절반 이상을 퇴출시켜 버린다.

안와르 알 사다트

가장 최근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역시 변호사협회에 우호적이지 않았는데 협회 역시 그의 탄압정책에 맞서 강하게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협회장으로 선출된 아흐마드 카와자(Ahmad Khawaja)는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언론의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다.

나세르는 1958년에 ‘긴급조치’를 제정했다. 구속영장이 없어도 용의자 구류가 가능하다는 내용의 이 법은 이론적으로 누구든 잡아갈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구류된 지 30일이 지나면 용의자는 청원서를 낼 수 있긴 하지만 내무부장관의 판단 하에 청원이 기각되면 다시 30일을 갇혀 지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두 달 후에 풀려날 수 있지만 긴급조치에 의거, 영장이 없어도 또 잡혀갈 수 있다.

정부는 그 동안 이 법을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좌익세력을 척결하는 용도로 악용했다. 파업 현장에 있었던 노동자들이나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낸 학생들 역시 이 긴급조치에 의거해서 많이들 끌려갔다. 1990년 당시 이집트 정부는 긴급조치로 인해 구류된 2,411명의 수감자 중에서 813명이 정치적인 이유로 갇혀 있다는 것을 인정한 바 있다. 2002년에는 수감자 수가 만 5000명까지 늘어났는데 이 중 대부분은 무슬림 형제단 단원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짓누른 이 악법은 올해 들어서야 겨우 폐지되었다!

정계로 눈 돌린 무슬림 형제단

생활 전반에 파고든 무슬림 형제단은 이제 정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탄압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온 무슬림 형제단이 마음만 먹는다면 정계진출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1984년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신 와프드당(New Wafd Party)과 연합해서 여당인 국가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의 303석에 맞서 58석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나 의회는 1986년 해산된다.

1987년 선거에서는 무슬림 형제단, 자유당, 사회노동당 등이 통합해서 이슬람 야권 연대를 결성한 후 60석을 차지하지만 의회는 다시 해산된다. 2000년 선거에서는 1995년 선거 때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한 인권단체들의 이의 제기 때문에 투표소마다 사법부 인력이 배치된 가운데 치러졌다. 그러나 경찰들이 투표소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시민들을 막는 등의 만행은 다시 반복됐다.

이상 세 번의 선거에서 보듯이, 정부 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계속 높아만 가고 이들 중 상당수가 여당에서 무소속 후보로 마음을 돌렸다. 2000년 선거 결과를 놓고 보자면 여당인 국가민주당은 388석을 얻었다. 그러나 당 고위 간부급 인사 22명이 의석을 잃었고 무엇보다 218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여당과 맞서는 듯 이미지 전략을 써서 당선됐다가 나중에 다시 국가민주당으로 돌아갔다. 정치학자들은 분석하길, 이 때 이미 무슬림 형제단을 인정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사이드 쿠툽(1903~1966)

나세르 정권과 대립한 ‘사이드 쿠틉’, 이슬람에 사상적 영향 끼쳐

무슬림 형제단하면 반드시 빠지지 않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바로 사이드 쿠틉(Sayyid Qutb, 1903~1966)이다. 뛰어난 사상가이자 문장가인 그는 이집트 북쪽 무샤(Musha)라는 곳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후 열 살 때 이미 코란을 전부 외울 정도의 천재성을 보였다. 하산 알 반나와 같은 다르 알 울룸 교육대학에 들어간 그는 이집트 작가 아바스 알 아카드(Abbas Al-Aqqad)에게 매료돼 영문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1934년 대학을 졸업한 후 알 아흐람(al-Ahram) 신문사에서 근무하다가 194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직접 경험한 미국은 그에게 실망만 안겨 주었다. 도덕적 타락은 도를 넘었으며 인종차별은 심했고 특별히 중동전쟁 즈음에 반 아랍 감정은 극에 달했다.

미국은 물론 서구 자체에 대해 신물을 느낀 그는 유학 후 이집트로 돌아와서 영국식 제도를 따르고 있던 이집트의 교육부터 비난하는 것으로 포문을 연다. 좀 더 이슬람스러운 교육을 강조하며 자유장교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사이드 쿠툽의 능력을 유심히 지켜본 카말 알 딘후사인은 그에게 교육부 장관 자리를 제의하기도 했고 그는 또 실제로 정부 관료로서 일을 하기도 했다.

1953년 정부 관직에서 물러난 후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한 그는 형제단의 교육 프로그램을 책임짐과 동시에 형제단을 대변하는 신문의 편집장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가 나세르 암살 미수 사건이 터졌을 때 다른 단원들과 같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감옥 안에서 주옥 같은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고 체계적으로 논리를 설명한 이슬람의 사회적 정의(al-Adala al-ijtima’iyya fi al-Islam, Social Justice in Islam)’, ‘코란의 그늘에서(Fi zalal al-Quran, In the Shade of the Quran)’ 그리고 ‘진리를 향한 이정표(Ma’alim fi al-tarig, Signposts along the way)’등이 모두 감옥에서 원고가 집필되어 이집트 밖에서 출간되었다.

감옥 안에서 고문을 받고 나온 쿠틉은 나세르 정권에 아주 적대적인 태도를 갖게 됐고 그 이후로 이슬람 세력과 이에 대항하는 악의 세력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코란 구절을 인용해 가며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영원히 이슬람과 맞설 것이며 시오니즘과 싸우기 위해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가 정리한 30권 분량의 코란 해석집은 이슬람 교도들이 코란을 공부할 때 쓰는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1964년 석방된 후 1965년 다시 투옥됐고 반역죄를 지었다는 명목 하에 196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사상은 이슬람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마르 알 틸미사니(1904~1986)

‘우마르 알 틸미사니’, 세속주의 맹비난

무슬림 형제단을 이야기하면서 세 번째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우마르 알 틸미사니(Umar Al-Tilmisany, 1904~86)이다. 전체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면서 무슬림 형제단의 주간지 알 다와(al-Da’wa)의 편집장도 겸했는데 1931년 국립대 법대를 졸업한 후 2년 뒤에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했다.

1954년 나세르 대통령 암살 시도 사건에 연루되어 15년을 감옥에서 살았으며 1976년부터 알 다와를 통해 세속주의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터키의 아타투르크조차 비난하며 오직 이슬람만이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1981년 9월 탄압 때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됐으나 무바라크 대통령 때 석방됐다. 그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의 엄격한 적용을 주장했지만 폭력과 테러에는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알 반나, 쿠툽, 우마르 알 틸미사니는 무슬림 형제단과 함께 호흡하는 역사이다. 이집트에서 태동해 지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하며 다른 급진 이슬람 단체들의 중심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 무슬림 형제단은 그래서 14세기에 모든 것을 포용하던 이슬람과는 전혀 다르다. 초기에는 이슬람 정신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온건 단체였으나 수많은 역사의 굴곡을 지나면서 그 성격이 변했다. 현재의 리더십은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그들의 변신이 주목된다.

번역 이명현 기자 EnjoyMiracle@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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