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성 추모글] 2016 한국시리즈 보니 형님 사무치게 그립더이다
야구해설가 하일성씨가 별세한 지 만 석달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아시아엔>은 지난 9월8일 아침 별세한 고 하일성씨를 추모하는 글을 <매거진N> 10월에 보도했습니다. 이에 하일성씨 추모글을 일부 수정해 다시 싣습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일성 형님, 하일성 형님! 형님 생각을 하면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오늘 아침 형님 소식을 듣고 ‘이건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닌데’ 하며 거짓말이기만 바랬습니다.
무더위가 일찌감치 찾아온 7월20일 형님과 통화한 게 마지막이었더군요. 작년 가을 이후 계속 안 좋은 뉴스만 인터넷에 떠 상심하던 중 그날도 또 쓰지 않아도 될 뉴스가 포탈사이트를 도배했지요.
형님의 말씀이 아직도 쟁쟁합니다. “이 회장, 이게 무슨 기사거리라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형님 ‘항변’이 일리가 있더군요. 음주운전하던 형수님 옆에 동승해 눈붙이고 있던 형님을 음주운전 방조혐의로 이 매체 저 매체에서 연신 두들기더군요. 작년 가을에 떴던 기사 대부분 가십거리도 안 되는 걸 갖고 형님을 실시간 검색 1위에 올려놓았지요.
어제 하루 종일 ‘하일성’ 형님 이름 석자가 실시간 검색어 1위 자리를 다시 차지했더군요. 작년 일로 저는 형님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고, 도움은커녕 위로도 못 됐지요.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미어옵니다.
형님, 일성 형님!
우리가 처음 만난 게 1989년 4월이었지요. 당시 한겨레신문 체육부 기자였던 제가 형님을 인터뷰하면서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토요일자로 나가던 ‘한겨레가 만난 사람’(한만사)에 형님이 등장한 것이었지요. 물론 그전부터 저는 형님을 알았었기에 인터뷰 발제를 했고, 그게 데스크에 의해 받아들여졌구요.
대치동 선경아파트, 형님 댁에서 인터뷰를 마친 형님은 청요리를 시켜 제게 배갈을 대접해 주었지요. 참 호탕하게 웃고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후 몇 년에 한두번 만났지만, 전화 목소리는 늘 반갑게 들렸어요. 세월이 한참 흘러 2007년 12월 말, 체육부장이던 저를 불러 공덕동 조그만 횟집에서 두 번째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축구해설하는 신문선 위원도 당시 한겨레 체육부원들과 동석했었지요.
형님, 우린 드문드문 만났어도, 언제나처럼 형님은 늘 이야기거리를 놓지지 않으셨지요. 그 비결은 형님의 부지런함과 스스럼없음이었더군요. 야구해설 있는 날은 시합 서너 시간 전에 운동장에 도착해 선수와 감독을 미리 만나며 해설꺼리를 준비한 형님의 습관 덕이었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는 6년을 더 기다려서야 만났더군요. 마지막 만난 2013년 10월18일 밤이었어요. 야구광 정운찬 전 총리와 서초동 한정식집에서 마주 앉아 제법 마셨지요. 태안에서 강의를 마치고 차를 몰고 온 형님이 내게 보낸 문자가 지워지지 않고 있더군요. “이 사장 돌겠다. 태안에서 4시에 강의가 끝났는데 이렇게 차가 막힐 줄 몰랐어” “이제 상황 풀렸어” “총리께 말씀 잘 전해드려. 이에 의왕이야”
얼마나 속이 탔으면 10분 간격으로 문자를 보내셨는지요?
그날 사실 형님은 별로 늦지도 않았거든요.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들 위해 스스로는 조바심에 떨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형님의 성정으로 어제 형님이 이 세상을 하직한 것 아닌가 여겨집니다.
남의 작은 아픔과 사소한 불편에도 맘을 쓰시는 형님이었기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형님이 자꾸 원망스러워집니다.
당신은 챙길 줄 모르고 남을 위해 살아온 평생이 그렇게 이승의 삶을 마감한 것 아닌가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미어옵니다.
형님, 오늘 잊고 있던 이 표현으로 위로를 삼고 싶습니다.
“회자정리 이자정회”(會者定離 離者定會)
형님 마침 오늘 매거진N 10월호에 보도된 추모글을 다시 찾아 보던 중 <Queen> 웹사이트에 ?실린 글을 발견했어요. 링크해서 붙입니다. 형님의 지난 몇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제가 형님께 얼마나 무심했는지요…
형님 고이 잠드소서.
2016년 늦가을 이상기 삼가 올림
http://www.quee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