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과 안동 병산서원, 그리고 징비록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 전경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 전경<사진=뉴시스>

[아시아엔=박명윤 보건학박사] 필자는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은 두어 차례 방문한 적이 있으나, 하회마을에서 약 4km 지점(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에 위치한 병산서원은 지난 4월9일 처음으로 방문했다.

조지 부시 미국 제41대 대통령(1989-1993)과 부인 바바라 부시는 2005년 11월13일 이곳을 방문해 서원 앞 정원에 기념식수를 하였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는 병산서원은 오동서원, 도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5대 서원으로 손꼽힌다.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있던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이 모체다. 서애 류성룡이 1572년(선조 5년)에 풍산현 북쪽에 있던 서당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류성룡 선생은 66세를 일기로 1607년(선조 40년) 서세(逝世)하였다. 그 후 지방 유림의 공의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광해군 5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일반적으로 서원 건축은 교학(敎學)을 위한 강학 건물과 제향(祭享) 공간인 사당, 부속시설 등으로 구분된다. 병산서원은 ‘강학건물군’으로 복례문, 만대루, 동재, 서재, 입교당, 장판각이 있으며, ‘제향건물군’에는 신문, 존덕사, 전사청이 있다. ‘부속시설군’에는 주소, 달팽이 뒷간, 광영지 등이 있다.

병산서원은 조선중기 서원 정신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건축되었다. 풍수지리에 입각한 지형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건물간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융통성이 돋보이며, 조선의 예학의 건강함을 잘 나타내는 모범적인 서원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병산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통해 들어가면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인 만대루(晩對樓)가 나온다. 만대루는 팔작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건물로 강학과 휴식의 복합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만대루에 오르면 낙동강과 병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누각 기둥 사이로 바라보이는 풍경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인 입교당(立敎堂)은 만대루 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전면 높은 석축단 위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치마 팔작기와집이다. 강학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에는 서원의 원장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敬義齋)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여 동쪽에 동재와 서쪽에 서재는 유생들의 기숙사였다.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큰 방(2칸 규모)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했다.

장판각(藏板閣)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판본의 소장량이므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하여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병산서원에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존덕사는 서원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애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매년 3월 중정(中丁,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서애 류성룡의 고향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이며, 1542년(중종 37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류중영과 어머니 안동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1세에 당대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에게 나아가 성리학을 배웠으며, 이황은 류성룡을 가리켜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칭찬을 들었다.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59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류성룡은 1591년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기 직전 왜란의 조짐을 감지하고 선조 임금에게 건의를 올려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 좌수사로,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조정의 견제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행했던 파격적인 인재등용은 패색이 짙던 전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다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며,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류성룡은 고향에서 징비록(懲毖錄), 서애집(西厓集), 신종록(愼終錄) 등을 저술하였다. 류성룡이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의(御醫)를 보내 치료케 했지만 류성룡은 1607년(선조 40년) 고향에 있는 농환재 초당에서 6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요즘 ‘징비록’이 KBS-TV에서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 7년간의 수기로서, 목판본 16권 7책은 국보 제132호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기록한 것으로, 임진왜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사료가 된다.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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