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한일관계 ‘굴곡’의 근원을 아십니까?

유럽의 영국·프랑스·독일 vs?동남아의 베트남·캄보디아·태국

꼬인?한일관계···‘견원지간’이던 그들에서 해법 찾을 수 있어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유럽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은 천년을 두고 으르렁대던 관계다. 샤를르 마뉴 대제 이래 천년 동안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이었다. 프랑스어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궁정어였다. 1차대전까지 프랑스어는 외교관의 공용어였다. 그러던 프랑스가 1870년 보불전쟁에서 패배하여 알사스 로렌을 내어주었다. 나폴레옹 이래 유럽의 패자로 군림하던 프랑스가 독일에 굴복하고 땅까지 빼앗겼다가 1차대전 후에 이를 되찾기까지 프랑스인의 처절한 굴욕감과 와신상담은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에 잘 그려져 있다.

동남아의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도 이만큼 복잡하다. 오늘날 캄보디아는 북한 수준의 세계 최빈국이다. 인도차이나가 공산화되자 캄보디아는 베트남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나라가 되었지만, 앙코르 와트로 유명한 크메르왕국은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태국, 라오스, 베트남에 걸친 제국을 건설한 동남아의 강자였다. 크메르 루즈가 집권하면서 베트남인들을 탄압하면서 베트남의 침공을 받았다. 등소평의 중국이 월맹을 손본다고 베트남을 침공하였다가 혼이 나서 패퇴된 것이 1979년 중월전쟁이다. 1975년 통일된 이후 도이모이의 개혁을 거친 베트남은 ‘손재주가 좋고, 개고기를 즐겨먹고, 천년 동안 중국의 압력 하에서도 정통성을 지켜낸’ 8500만 인구를 가진 동남아의 강자로 앞으로 우리가 더욱 굳게 손잡을 나라다.

1453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B.C 480년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샤가 그리스에 패퇴한 이래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던 유럽이 오리엔트에서 밀려났다. 오스만터키는 1차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이었으므로 1차대전의 전후 처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해체였다. 오스만 터키 치하에 있던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바이런 등 유럽 지성인이 지원한 것은 서양문화의 원형을 찾자는 운동이었다. 현재 그리스와 터키는 같은 나토의 동맹국이면서도 견원지간이다.

668년 동북아의 세계제국, 수와 당을 상대로 만주와 북 중국의 패권을 다투면서 한민족의 방파제가 되었던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이때로부터 한민족은 중국대륙과 연을 끊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영의 요동정벌, 정도전의 요동정벌 구상이 보여주듯, ‘대륙’은 한민족에게 남아 있던 DNA의 한 부분이었다. 우리가 통일을 앞두고, 간도문제 등은 중국과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영토는 회복할 수는 없더라도 동북공정 등 역사위조, 침탈은 분명히 막아야 한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 부여성의 함락으로 사직은 무너졌으나, 백제인의 숨결이 완전히 끊긴 것은 일본으로부터의 구원군이 당군에 패배한 663년의 백강전투다. 이래로 일본에 도래한 백제인은 대륙과 인연을 끊었다. 일본말로 “구다라와 나이”-“백제는 없다”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이다. 이후로 일본인은 신라 및 뒤를 이은 고려와 조선에 대해서는 응어리를 갖게 된다. 한국인은 일제 식민지시대를 잊지 못하지만, 일본인은 잃어버린 백제를 못내 그리워하여 대동아전쟁 말기에 부여에 황궁을 옮기려고도 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이것은 생소한 일일 것이다. 이처럼 한일관계는 복잡한 구연이 서로 얽혀있다. 먼 나라에서 함부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역사문제는 이방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당사자들이, 또 시간이 해결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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