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시대, ‘고령영화’ 뜬다? (상)] 2014년은 ‘고령영화의 해’ 1000만 영화에서 대박 다큐까지
2014년 한국영화계는 고령자를 주인공으로 한 ‘고령영화’가 주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외 다양한 고령영화들이 개봉돼 좋은 성적을 거뒀고, ‘서울노인영화제’는 국제영화제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시아엔>은 고령시대를 맞아 2014년 고령영화의 흐름과 의미를 두 차례에 걸쳐 정리한다. – 편집자
[아시아엔=이재광 을지대 산학협력단 시니어사회ㆍ경제연구센터 소장] 2014년 한국 영화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현상 하나가 있었다. 바로 고령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고령영화가 붐을 이룬 한 해였다는 사실이다. 몇 년 뒤, 어쩌면 영화계는 2014년을 가리켜 ‘고령영화에 한 획을 그었던 해’로 얘기할지 모른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 많다.
무엇보다 먼저, 2014년 영화계가 고령영화로 시작해 고령영화로 끝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14년 시작과 동시에 영화계를 달궜던 <수상한 그녀>(감독 황동혁), 그리고 한 해를 마감하며 화제를 몰고 온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을 보라. 두 영화 모두 1960~70년대 맹활약했던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 이야기다.
물론 이 두 편의 영화만으로 2014년을 ‘고령영화의 해’로 규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2014년은 작품성을 갖춘 고령영화 다수가 빛을 본 해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최고의 성적표를 거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감독 진모영),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설경구, 박해일 두 배우의 걸출한 연기를 볼 수 있었던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 등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게다가 낯선 나라의 저예산 고령영화가 관심을 끌었고, 한 지자체가 운영하는 고령자 대상 영화제가 양과 질적인 면에서 한 단계 도약을 이루기도 했다. 지난해 6월 개봉한 100세 노인의 기상천외한 활약상을 담은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감독 플렉스 할그렌)과 7회째를 맞아 개봉 작품수를 늘리고 일본 영화를 초청하는 등 국제영화제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서울노인영화제가 그것이다.
이 같은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2014년은 시니어 영화가 국내 영화계의 흐름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술한 정황들을 좀 더 면밀히 파헤쳐 보자.
‘수상한 그녀’ 고령영화 포문 열어
‘2014년 시니어 영화의 해’를 설명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수상한 그녀>를 거론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1월 22일 개봉한 이 영화는 시작부터 화제에 올랐다. 대목인 설 연휴를 맞아, 설날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한 것이다. 설 당일 <수상한 그녀>를 찾은 관객은 54만3016명. 누적 관객 수는 270만8425명으로, 새로운 대박의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이날의 선전(善戰)은 다른 ‘강자’를 누른 것이어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할리우드가 세계시장을 겨냥해 만든 대작 애니메이션 <겨울왕국>(감독 크리스 벅, 제니퍼 리)과 또 하나의 1000만 관객작 <변호인>(감독 양우석)이 <수상한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왕국>은 설 당일 관객 45만897명으로 누적 관객 481만2494명을, <변호인>은 각각 9만2704명과 1095만9502명을 기록했다. 그런데 <수상한 그녀>가 이들 두 대작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설 직후 언론의 이목이 이 영화에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그뿐 아니다. <수상한 그녀>의 행진은 설 연휴가 끝나고도 계속됐다. 총관객수는 860만 명. 역대 흥행기록 15위를 차지하며 또 하나의 ‘흥행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계는 이 같은 성공의 배경에 심은경이라는 걸출한 젊은 배우의 연기력이 있음을 주목했다. 심은경은 <써니>(2011),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등에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수상한 그녀>에서 심은경은 노배우 나문희의 젊은 시절을, 그야말로 ‘나문희처럼’ 연기함으로써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수상한 그녀>는 심은경이라는 젊은 배우의 연기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령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 스토리 전개 상 주인공은 70대의 극중 ‘오두리’이기 때문이다. 나문희와 심은경 두 배우가 번갈아 가며 맡은 오두리는 젊은 시절 독일에 광부로 간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며 모진 세월을 보낸 여인이다. 영화에서는 시장에서 안 해 본 일 없는 ‘억척 여인’으로 그려진다.
베스트셀러와 쌍끌이 ‘~100세 노인’
2014년 상반기의 시니어 영화는 <수상한 그녀> 한편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상한 그녀>의 열기가 시들해질 무렵 또한 편의 시니어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가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2014년 6월 개봉한 이 영화는 우리에게는 낯선 스웨덴 감독, 스웨덴 배우들이 만든 작품이다. 스웨덴의 언론인 출신 작가 요나스 요한슨의 동명 소설이 원작. 요한슨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전 세계 600만부 이상 팔리며 유명세를 탔다.
특히 주인공 알란의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장면 하나 하나가 관객의 시선을 끈다. 스탈린과 프랑코의 목숨을 구하고 고르바초프를 만나 소련 붕괴에 한 몫을 담당했다는 내용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100세 노인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게 해 준다.
이 같은 ‘특별한 스토리’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보통의 노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늙고 힘없어 보이는 노인이라고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흥행면을 보자. 총관객수는 24만1000명. 1000만 영화가 속출하는 상황이니 ‘참패’라는 딱지를 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저예산 영화, 그것도 우리에게는 낯선 스웨덴 영화다. 감독도 출연자들도 국내에선 모두 생소하다.
이런 이유도 인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는 ‘다양성 영화’로도 분류된다. 그렇다면 흥행 측면에서의 이 영화에 대한 평가도 달리 봐야한다. 개봉 이후 2주 이상 이 부문 선두를 유지했으며,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 <엣지 오브 투모로우>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작품들과도 경쟁해 전혀 밀리지 않았다. 여름방학 시장에서 다양성 영화로는 유일하게 전체 박스오피스 TOP 5의 자리도 유지했다.
‘서울노인영화제’ 국제영화제로 거듭
2014년 상반기, <수상한 그녀>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막 관심을 끌기 시작한 고령영화는 하반기 주자들에게 바통을 넘겨줬다. 하반기 첫 번째 주자는 서울노인영화제. 7회째를 맞으며 적지 않은 인지도를 얻은 이 영화제는 2014년 몇 가지 점에서 변신을 시도, 이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2014년 서울노인영화제는 아시아 국제영화제로서의 변모를 꾀했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상영 영화 편수다. 단편 경쟁작 38편, 초청작 19편 등 총 57편이 상영됐다. 2013년 6회 영화제 때 상영 편수가 36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무려 56%가 늘어난 수치.
그밖에 영화계는 ▶ 마스터클래스 부문을 신설, 고령자에게만 지원됐던 예산을 50대까지로 확장함으로써 영화제의 참여 폭을 넓혔다거나 ▶ 일본영화 <동경가족>을 상영하고 일본에서 활동 중인 고령 감독을 발굴, 초청함으로써 향후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영화제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는데 의미를 뒀다.
이 같은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적지 않은 영화인들이 서울노인영화제에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잘만 하면 독특한 테마의 국제영화제 출현을 기대할 수 있으며, 이는 한국영화계가 갖는 또 다른 성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서울노인영화제가 기대처럼 국제영화제로 발돋움 할 수 있다면, 훗날 영화계는 2014년을 그 시발점으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