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의 세상만사] 루소는 ‘기업인 가석방’을 어떻게 생각할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16살 때 친구들과 과수원에서 배를 훔쳤다. 배서리다. 훔친다는 건 뭘까? 단순히 궁금해서 한 소행이었다. <고백록>(Confessiones)에 나온다.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Les Confessions)에 이렇게 적었다. “14살 도제 시절, 주인집 사과와 아스파라가스를 훔쳤다. 친구를 도우려고 그랬다.” 16살 때는 좀 악질이었다. 백작 집 하인으로 일했다. 부인의 리본를 훔쳤다. 발각되자 또래 여자 요리사가 훔쳐서 자기에게 줬다고 둘러댔다. 소녀가 날벼락 맞고 둘 다 해고됐다.

장 주네는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 출신 사생아다. ‘어머니한테 버려짐과 동시에 나는 사망했다’는 생각을 일생 버리지 못했다. 그의 생계수단은 도둑질이었다. 수감생활 중 글쓰기를 시작했다. 출생의 치욕과 범죄 전과가 바탕이 됐다. 37살 때 상습절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문인들 탄원으로 집행유예로 석방돼 쓴 도둑일기는 자전소설이다. 훔치기를 묘사했다.

훔칠 게 많았던 런던

템스 강은 왕래하기에 편리했다. 교역선이 드나들었다. 강을 끼고 도시가 타원형으로 발전해 상공업이 융성했다. 일터도 적지 않아 농민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농촌을 떠나온 사람 모두한테 줄 일자리는 없었다. 농토는 이미 지주나 공장주에게 뺐긴 터. 귀향은 불가능했다. 17세기 초에는 런던 이스트앤드에 빈민가가 형성됐다. 귀족과 유산계급은 대로변 대저택에서 살았다. 부자들은 풍요 속에서 안락을 누렸으나 뒷골목에는 판잣집이 이어졌다. 빈민들은 굶주림 속에 죽어갔다. 상하수도는커녕 대소변조차 아무데서나 봤다. 질병과 범죄와 죽음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남편은 도둑질이나 강도질. 아내와 딸은 몸을 팔았다. 아들은 소매치기. 빈민구제법은 1601년 벌써 제정됐으나 무용지물이었다. 교화원이나 감화원은 강제노동공장이나 다름없었다. 자선단체가 생기기 시작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도시화와 상업화는 더욱 진행됐다. 런던은 유럽의 상점가가 됐다. 상품별 전문점이 블록별로 들어섰다. 영국부자들이 물건을 맞추러 왔다. 대륙의 귀족들은 섬나라 수도로 쇼핑하러 왔다. 상점 들치기가 자연스레 늘었다.

훔칠 곳 생긴 파리

세계 최초 백화점은 파리의 Le Bon March?다.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지었다. 초호화 최고급 쇼핑시설이었다. 동행한 남성에 대한 배려도 했다. 당구장 같이 여성이 쇼핑하는 동안 기다리며 쉴 공간을 마련했다. 착 달라붙는 반바지 퀼로트(culotte)를 입은 귀족은 출입이 가능했지만 퀼로트를 입지 않은(sans-culotte ) 소시민과 노동자는 출입 불가였다. 에밀 졸라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Au bonheur des dames)는 봉마르세를 무대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영어로는 <여인들의 천국>(The Ladies’s Paradise). 20살 시골처녀 드노즈는 동생을 부양하고 기아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파리로 왔다. 친척은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받아주지 않는다. 백화점 때문에 망해서 문 닫는 주위 가게들을 보면서도 판매사원으로 취직해 사장과 결혼한다. 마담 드 보브는 나이 40. 몰락한 귀족 집안 마나님이다. 몸에 거치고 싶은 사치품이 어디 하나 둘인가. 방법은 뭘까? 상점 들치기(shoplifting)다. 그러다 발각됐다. 가슴에서 손수건과 넥타이와 부채가 나왔다. 소매에 레이스를 숨긴 게 들켰다.

훔치면 무조건 죽인다

부자들은 문마다 덧문을 대고 빗장도 질렀다. 외출 때는 횃불과 총을 든 하인을 대동했다. 정부는 군대도 배치했다. 도둑은 증가일로, 죽이는 게 상책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1668년-1800년 사이에 관련 법 150개가 제정됐다. 사형조항이 다 들어갔다. 피의 법률(Blood Code)이다. ‘들치기 법’(The Shoplifting Act of 1669)도 마찬가지다. 5실링 이상이면 교수형에 처하거나 뺨에 도둑낙인 찍기도 병행했다.

개 도둑도 극성 부렸다. 리차드 메인 런던경찰청장은 “최근 1년 간 600마리 실종에 도난된 개가 60마리”라고 밝혔다. 에드먼드 헨더슨 런던경찰청장은 세탁물 도둑 급증에 순찰경관에게 지시했다. 담당구역 내 주민에게 값나가는 리넨을 잘 간수하도록 일일이 알리라고 말이다.

체포장려법률(Act for Encouraging the Apprehending of Highwaymen of 1692)도 시행했다. 체포 1건에 최대 40파운드를 지불했다. 당시 소작농과 도시빈민의 1달 수입은 6.5파운드였다. 엄청난 금액이었다. 지하세계에 밝은 전과자가 거의 다 받아갔다. 도둑이 도둑 잡는 도둑인 셈이다. 선량한 시민을 도둑으로 만드는 현상도 초래됐다.

훔친 사람이 걸어가는 사형장길 4.8km

1720년대 런던인구는 70만명, 이 중 1만명이 도둑이었다. 상점 들치기는 대부분 농촌출신 젊은 미혼여성이었다.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이 하루 한끼라도 먹으려고 고향을 떠나왔다. 취직이 어디 쉬운가. 매춘 아니면 상점 들치기로 연명했다. 매춘과 들치기를 겸하기도 했다. 잡히면 교수형대기소인 뉴게이트(Newgate)교도소로 직행했다. 죄수의 1/3은 좀도둑(pickpocket)이었다. 그 안에서의 생활도 빈부격차가 심했다. 돈 없으면 주린 배 웅크려야 했다. 1주일에 2실링 6펜스를 내면 특실이 제공됐다. 융단 깔린 감옥이다. 가구와 침대와 식탁이 구비되고 식사하며 포도주를 마신다. 하인의 시중도 받는다. 하지만 처형장인 타이번(Tyburn) 가는 길은 똑 같았다. 채찍과 돌팔매 속 4.8km 거리. 짐마차 뒤에 묶여 질질 끌려갔다. 형리에게 돈을 줘야 그나마 편했다. 채찍질 살살하는 데 5~10실링(500~1000원). 단번에 숨 끊는 데는 5~6기니(12000원 내외). 시체는 해부연습용으로 넘겨졌다. 죽이고 죽여도 범죄는 횡행했다. 1690년부터 1799년에 이르는 110년간, 범죄황파(The Crime Waves)였다.

훔친 게 적어서 교수형-많아서 집행유예

범죄는 줄어들지 않았다. 새로운 1백년 19세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돌연 사회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중산층과 시민계급 의식에 변화가 왔다. 실업자와 빈곤층 범죄자에게 극형, 먹을 게 없어서 훔치면 교수형에 처해지는 현실에 지식인이 고뇌하기 시작했다. 찰스 디킨스는 굶주린 아기엄마의 들치기범을 사형시키는 영국인을 어떻게 볼 건가 고민에 빠졌다. 이탈리아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의 계몽주의 이론이 주효했다. 형벌은 가혹성보다는 정확성이 중요하다는(not it’s severity, it’s the certainty of punishment) 주장을 이해했다. 사형폐지운동->범죄감소->치안안정을 거쳐 1823년 마침내 교수형과 유형을 폐지했다. 관리(governance)가 아니었다. 문화(culture)가 관건이었다.

큰 도둑에 엄격하고 생계형엔?관용해야

있는 자는 경찰이나 검찰, 법원이 봐주지 않아도 된다. 관청이 나서지 않아도 제 밥그릇 이상으로 다 찾아먹는다. 돈 있겠다 연줄 있겠다 부족함 없다.? 영장심사도 며칠 말미 줄 이유가 없다. 인멸하고 은폐하고 말 맞출 시간을 서비스하는가. 겉에서 봐서 이건 봐주는 게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해선 곤란하다. 돈 많은 이건 돈 없는 이건 공평성이 피부에 와닿아야 한다.? 죄 지어서 교도소 들어 앉아 있는 경제인은 왜 자꾸 건드리나? 가석방이 어떻고, 청와대 소관이 아니라 법무장관 고유권한이라고 선을 긋는다? 속 뻔히 들여다보이는 통신이다. 일반인은 형기의 85%는 넘겨야 풀어준 관행이 아직 살아 있다. 회장이나 사장은 형기의 3분의1만 넘기면 된다고? 회장이나 사장이라고 특별대우 하면 경기가 살아난다고? 우리 경제규모가 그런 시대는 지났다.

훔쳐서 생활물자 조달하라고?

1960-70년대 미국. 청년들의 반역이 일어났다. 어버이세대 기성문화에 대한 도전, 대항문화(counter culture)였다. 월남전 반대가 제일 큰 이슈였다.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 누더기 차림의 히피행색. 록 뮤직과 마약이 상징이었다. 1971년. 애비 호프만이 <이 책을 훔쳐라>(Steal this Book)가 출간됐다. 내용은 공짜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어떻게?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 들치기 하라. 동네 구멍가게는 대상이 아니다. 소비자 착취하는 재벌과 자본가에게서 훔치라. 반년 사이에 25만권이 팔렸다. 몇권이나 훔쳐갔을까? 불가능했다. 책을 철사로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루소는 “좀도둑질은 범죄가 아니다. 사유재산이 불평등과 빈곤의 원인이며 도둑을 만든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필요로 인해 훔치는 건 강도가 아니다. 좀도둑이며 처벌해선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 철학자의 주장은 현실세계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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