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 칼럼] 북한에 망명신청한 미국인의 운명은?

2014년 4월, 미국인 매슈 토드 밀러가 북한관광비자를 훼손하고 미국여권을 제출하며 북한에 망명을 신청해 화제가 됐다. 조선중앙방송(KCNA)은 이 사건에 대해 ‘평화를 사랑하는 밀러 동지, 미국에서 탄압받다’라고 보도하는 대신 그가 이민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북한 정부는 성명을 통해 밀러가 조만간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 밝혔다. 밀러 사건 이전에도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국가로 망명을 요청했던 사례들이 있다.

오래 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상낙원을 건설하고자 러시아로 향했다. 일부는 공산당에서 출세했지만, 대다수는 허무맹랑한 이상주의에 빠졌던 것을 후회하며 필부의 삶을 살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대공포시대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강경파를 차치하더라도, 대다수는 ‘방향성’에 대해 뚜렷한(또는 심각하게 왜곡된)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다. 밀러와 유사한 사례도 의외로 많다. 그들은 지상낙원을 꿈꾸며 공산주의를 택했지만, 비참한 현실과 체제의 부당함을 목격하며 실망했다. 또한 그들의 삶도 처참히 무너졌다.

요시코 오카다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녀는 일본 무성영화 시대 유명 배우였고 남편 료키치 스기모토 역시 유명 영화감독이었다. 부부는 일본 군국주의에 분개해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1938년 1월, 그들은 일본 국경경비대 위문공연을 핑계로 사할린 남부로 갔고, 그 곳에서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건너갔다. 부부는 즉시 억류됐고, 소련은 그들을 간첩죄로 처벌했다. 남편 스기모토는 재빨리 죄를 시인한 후 총살당했고, 오카다는 고통스런 고문을 받았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급격히 무너진 그녀는 죄를 자백한 후, 10년간 수용소에 갇혔다. 석방 후에도 오카다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오카다는 모스크바에서 일본어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됐고, 일본인 전쟁포로와 결혼도 했다. 또한 그녀는 연기경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 연기학교를 졸업했다. 운이 좋은 경우였다.

오카다-스기모토 부부와 같이 여전히 회자되는 경우도 있지만 잊혀진 경우도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살던 38세 금속공 에드워드 스피어의 사례는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팀 줄리어디스에 의해 알려졌다. 1941년 9월, 에드워드는 캘리포니아에서 소련으로 가는 배를 타고 밀항했다. 예상대로, 소련 경찰은 어리숙한 공산주의 광신도를 즉시 체포했다. 그는 미 영사관 직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 사회시스템을 맹렬이 비난했다. “어딜 가든 옳은 사람과 그른 사람이 있다. 미국에서 그릇된 이들은 국가를 다스리는 반면, 소련의 그릇된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있다.” 반년 후인 1942년 3월, 스피어는 소련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그는 미 영사관 직원들에 했던 발언을 부인했고, 그들에 도움을 간청했다. 미국은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소련 당국은 스피어가 소련 법에 의해 처벌받을 것이라 경고했다. 1943년 1월3일, 에드워드 스피어는 다른 수용소에서 이동하던 도중 폐렴으로 사망했다.

과거 공산국가로 망명한 이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며 많은 것이 변했고, 북한도 과거 소련과 달리 외국인들을 매우 신중하게 다룰 것이다. 따라서 밀러는 재판장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번역 임성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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