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사태, 美-이란 관계개선 디딤돌?···걸프국들은 ‘따가운 눈총’
군사협력 가능성은 일축···걸프 맹주국 사우디 “외국 개입 반대”
수니파 급진 무장단체가 봉기하며 촉발한 이라크사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숙적’ 미국과 이란이 머리를 맞댔다. 양국은 지난 1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이란 핵협상을 계기로 이라크 사태를 짧게 논의하는 등 이례적인 공조 분위기를 조성했다.
대부분 이슬람 수니파 왕가가 통치하는 걸프아랍국들은 미국과 이란의 이같은 협력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작년 하산 로하니 대통령 취임 이후 양국 사이에 조성된 우호적 분위기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국의 이라크사태 개입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이란 협력 역사···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란과 미국은 1979년 테헤란 미국대사관 점거사건 이후 공식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후 이란의 핵무기개발 의혹에 미국은 각종 제재로 이란을 압박했고, 이란은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외교관계 단절 이후 양국 사이에 협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일시적인 협력에 그치기는 했지만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미국에 탈레반 관련 정보를 넘긴 바 있다. 이후 이란에 강경보수 성향인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양국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변화조짐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월 취임 연설에서 이란과 접촉의사를 공개적으로 피력했고 같은 해 3월에는 동영상으로 이란력 새해 인사 메시지를 보냈다. 중동 일간지는 17일 “지난해 3월 미 국무부 윌리엄 번스 부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조 바이든 부통령 선임 외교보좌관이 처음으로 오만 무스카트에서 이란과 비공개 양자접촉을 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중도온건 성향의 로하니 대통령이 공식 취임했고, 번스 부장관과 설리반 보좌관은 이란과 두차례 더 만났다. 지난해 9월 이란의 암묵적 동의와 지지를 바탕으로 러시아가 시리아의 화학무기 폐기를 제안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고, 같은 달 말에는 뉴욕 유엔총회를 계기로 오바마와 로하니의 역사적인 전화통화가 성사됐다.
번스 부장관과 설리반 보좌관은 10월 무스카트에서 이란측과 네 번째로 만난 데 이어 미국측 실무협상을 지휘하는 웬디 셔먼 정무차관까지 포함한 다섯번째 양자접촉까지 성사됐다. 이를 토대로 양측은 10년을 끌어온 이란 핵협상에서 같은 해 11월24일 잠정 합의를 도출했고 이를 토대로 7월20일까지 최종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 중이다.
양국은 이라크에서 급진 수니파 무장세력을 억누르고 현 정부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데 같은 생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5일 미국 정부 고위관계자들을 인용, “미국정부가 이슬람 수니파 무장세력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의 봉기로 촉발된 이라크사태 해결을 위해 이란과 직접 대화를 준비 중”이라고 보도했다.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같은 날 오바마 대통령과 최근 서신교환 사실을 공개하며 이라크 사태와 관련해 미국과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결국 양측은 1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재개한 이란 핵협상 테이블에서 이라크 사태를 논의했다. 양측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NYT)는 “번스 부장관이 핵협상 전에 이라크사태를 가볍게 언급했으며 급진 수니파 무장세력의 위협을 완화하고 더욱 안정적인 이라크정부를 만들기 위한 양국의 공조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양국의 공조가 군사협력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라크사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에는 양국의 입장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항모전단을 걸프해역으로 이동시키는 등 제한적 공습이나 무인기 공습을 포함한 군사적 선택도 고려하는 분위기다.
반면 이란은 외무부 대변인이 외국의 군사개입은 이라크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는 등 군사 개입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부 서방언론과 미국과 이라크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란이 이미 500∼2000명의 병력을 이라크에 파병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다. 물론 이란정부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이라크에 추가로 파병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에 따라 기존에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에 파병한 이란혁명수비대 산하 정예부대 ‘쿠드스'(Quds) 간부 일부와 민병대 바시즈 대원이 이라크 정부군을 돕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국 역시 이란과의 군사협력 가능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배제하는 입장이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부대변인은 “이란과의 어떤 대화에서도 군사협력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란과의 군사협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일축했다. 양국 사이에는 이란 핵무기개발 의혹 해소 등 관계정상화가 완전히 이뤄지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특히 미국은 중동의 전통적인 맹방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반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재 진행중인 유엔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P5+1)과 이란의 핵협상이 잘 풀린다면 미국과 이란 양국관계의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이라크 사태를 놓고 미국과 이란의 공조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지만 걸프 군주국들은 촉각을 세우는 분위기다.
특히 사우디는 공보장관 명의의 성명을 발표해 이라크 사태에 외국의 개입에 반대하고 나섰다. 중동의 맹주를 자처하는 사우디는 군사·안보·자원·경제 분야에서 70년간 미국과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역내 최고의 맹방으로 꼽힌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의 시리아 정책과 이란과의 화해 움직임 등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우디는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보복조치로 시리아 공습안을 포기한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에 분노했다.
지난해 8월 로하니 이란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과 이란 사이에 조성된 우호적인 분위기 역시 사우디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사우디는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으로,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경쟁 관계에 있고 시리아 정권은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사우디가 이라크사태를 논의하는 미국과 이란의 모습에 불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최근 무슬림형제단 지원문제로 사우디와 관계가 껄끄러워진 카타르 역시 이라크사태에 대해서는 사우디와 보폭을 맞추는 분위기다. 칼리드 알아티야 카타르 외무장관은 국영뉴스통신 QNA가 전한 성명에서 “이라크 사태는 알말리키 총리의 수니파 억압정책이 초래한 것”이라며 모든 정파를 아우르는 통합정부 구성을 촉구했다. 칼리드 장관은 “사우디와 마찬가지로 이라크사태에 대한 외국의 개입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근동걸프군사분석연구소 테오도르 카라시크 박사는 “이라크 문제로 미국·이란의 협력이 실제 이뤄진다면 이란의 국제적 고립 탈피와 국제사회의 대이란 제재 해제로 이어질 것”이라면서 “이는 걸프국들이 원치 않는 시나리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