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사마천의 ‘사기’를 다시 읽는 이유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은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로 자는 자장(子長)이다. 기원전 104년 공손경(公孫卿)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의 기초를 세웠으며, 역사책 <사기>를 완성하였다.

즉, 사마천의 사기는 어느 나라 사서(史書)인가? 그냥 중국 사서라고 하면 곤란하다. 사서는 한족(漢族)뿐 아니라 당시 중국대륙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의 사서다. 사실 중원대륙 지배역사 또는 거주기간은 하와족(漢族) 보다는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훨씬 길다. 사서는 승자의 기록이기 마련인데, 사기는 그래도 사마천 개인이 많은 답사와 검증을 거쳐 집필한 사실에 가까운 사서다.

우리는 중국(中國)역사에서 사마천(司馬遷)하면 <사기>, <사기>하면 사마천이 단연코 떠오른다. 중국 고대사에서 이 책을 빼놓고선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정도로 <사기> 역사서에는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와 무수한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담겨있다.

전한 무제(武帝) 때 사상가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는 BC 90년경에 만들어졌다. 고대 중국을 무대로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의 역작(力作)이자 명저(名著)로 알려져 있다. 사기는 총 130권으로 방대하게 이루어져 있다. 본기(本記)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烈傳) 70권의 5부로 나누어져 있다.

명나라 때의 백과사전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실린 사마천의 모습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라는 사관(史官)의 우두머리가 되어 역사 편찬에 종사했다. 그러나 한때 비운의 패장이자 친구 사이로 알려진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 男根을 절단하는 형벌)을 당한 불운의 사나이로 잘 알려졌다. 이후 감옥살이를 하다가 출옥 뒤 그 굴욕을 역사서 편찬(編纂) 사업으로 이겨낸다. 그는 본인의 자서(自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궁형을 당한 다음 깊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컨대 공자(孔子)는 어려운 여행 중에도 <춘추(春秋)>를 지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屈原)은 추방된 뒤에 걸작인 장시(長詩) <이소(離騷)>를 지었다. 또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대부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한 뒤에 역사서 <국어(國語)>를 편찬했다. 이처럼 인간이란 마음 속에 깊은 불만이 쌓이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을 때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런 <사기>의 음울(陰鬱)한 표현과 날카로운 통찰,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는 그런 사연과 통찰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살던 시대에는 한 무제의 치세였지만 사상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인류사의 대변혁기라 할 수 있다. <사기>는 이렇게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사료(史料)로서가 아니라 사상서(思想書), 문학서(文學書)로도 널리 읽히는 것은 이와 같은 사마천의 냉철(冷徹)한 시선으로 관찰된 인간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듯이 기술(記術)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초의 ‘기전체(紀傳體)’로 쓴 <사기>의 스타일은 <한서(漢書)> 이후의 중국 역사서로 이어진다. 사마천의 다양한 시각과 가치관으로 묘사된 <사기>에 버금가는 저술은 없다 할 정도로 그 평가는 아직도 높이 사고 있다. <사기>에 기록된 총 5부작의 내용들을 다 살펴보기는 너무나 방대하다. 그래서 그중 간단히 <사기> 속에 나온 명문장 몇 개를 음미해 보는 것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정리하는 것이 어떨까?

첫째,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

<진섭세가>편에 나오는 글이다. 직역하면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겠나”다. 소인은 큰 뜻을 품은 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시황제(始皇帝)가 다스리는 진(秦) 제국에 대항하여 최초로 반란군을 일으킨 진승이 젊은 시절 머슴살이 할 때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말을 했다가 동료들의 비웃음을 샀다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둘째,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

그 유명한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디 따로 있다더냐!”의 원문이다. 바로 진(秦)나라의 폭거에 반기를 든 진승이 반란을 일으키고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다.

셋째, 대행불고세근(大行不顧細謹)

큰 일을 할 때는 사소한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툴 때, 진의 수도 함양 교외의 홍문에서 양웅(兩雄)이 술자리를 가졌다. 이때 위험을 느낀 유방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탈출했다. 항우에게 인사도 못 하고 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부하 번쾌가 그 말을 받아 한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저 방대하고 난해(難解)한 사마천의 사기를 이 글 몇 줄로 정리하여 알 수는 없다. 사기가 중국 사서라는 말은 마땅치 않다. 그 시대를 살았던 동이족을 비롯한 모든 민족의 사서인 것이다. 사마천과 그의 사기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며, 사서 중에는 최고의 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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