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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국헌의 직필] 지금 한반도서 전쟁이 터진다면···계엄령과 사령관은?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50년 6월 25일 북한 남침이 개시된 뒤 이승만 대통령은 바로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다. 이는 이승만이 선후, 완급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령을 선포하면 육군참모총장이 주체가 되어 계엄업무를 시행하게 된다. 전쟁을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계엄업무는 군에 부담을 제기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5일 미군 참전 후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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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김종필을 ‘김모군’이라 부른 이 시대 마지막 혁명가 박창암 장군을 아십니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박창암은 1921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이병형 장군이 태어난 곳도 북청이지만 물장사를 하여서라도 자녀를 공부시키는 북청인의 생활력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박창암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였다. 관동군에 있다가 귀국해 특수공작차 북행, 인민군 수뇌부에 침투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돼 수감 중 탈출해 중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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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차규 공군총장, 22년전 순직하신 조근해 대장 기억나십니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순직하는 것은 드무나, 충격이 크다. 김백일 장군이 1951년 작전회의 후 태백산맥을 넘다, 김홍한 2군사령관이 1984년 비행기로 이동 중 순직하였다. 1993년 공군 참모총장 조근해 대장이 비행기 사고로 순직하였다.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행사를 점검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조근해 총장은 그 자리에 좌정하여 숨져 있었다고 한다. 독실한 카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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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군인사 최고 패착 채병덕을 아십니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6.25전쟁에서 초기에 기습남침을 당한 것은 북한군의 준비가 국군에 비해 크게 달랐던 점도 있으나, 채병덕 참모총장의 졸렬한 작전지도가 치명적이었다. 채병덕은 남침을 경고한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등 정보국의 보고를 무시하고 비상을 해제하고 중기(重機)를 입고시켰다. 이에 대해 상당수 간부들은 채병덕이 통적분자가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6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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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후 장군①이재전] 율곡사업 ‘핵심’ 자주국방 토대 다져···차지철 밑에 둔 건 박정희 ‘오점’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재전은 1968년 1.21사태 당시 1군사 참모장이었다. 김신조의 충격으로 전선에 철조망이 쳐지고 1953년 휴전 이래 전선이 말로만 ‘철통같던’ 전방 방어태세가 실질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때까지는 지금의 군사분계선처럼 엉성한 유자 철조망에 불과했고, 장벽이 아니었다. 철조망은 오키나와의 미 해병사단 주둔지 둘레에 쳐져 있던 것을 가져왔는데,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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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장군들⑩한신] 일본학도병 출신 최고의 연대장···’장병 제1주의’ 지침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신은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대를 나와 일본군에 징집되어 남방에서 전투한 학도병출신이다. 박정희와 같이 육사 2기생으로 임관한 한신은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 1950년 7월 김석원 사단장 예하에서 안강·기계 방어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1951년 5월 대관령 전투에서는 중공군과의 고지 점령에서 간발의 차로 고지를 선점하여 3군단의 치욕의 현리전투 이후 밀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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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장군들⑨이종찬] 친일파 후손이나 군 정치중립 지킨 ‘참군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종찬은 한일합방에서의 역할로 자작을 받은 이하영의 손자로 태어나 일본 육사 49기로 임관, 공병 소좌로 해방을 맞았다. 동기생으로 채병덕이 있다. 이응준, 김석원 등의 대좌들은 대한제국 군대에 들어 왔다가 한일합방 후에 일본군에 편입된 경우이고,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육사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구 왕실 등에 극히 제한되었다. 이종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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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가안보회의④타기관 관계] 국무부·국방부·CIA와 역할분담 명확 ‘효율 극대화’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NSC 창설의 실질적 의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미국의 대외정책, 군사정책을 각 부처와 기관 차원이 아니라 대통령의 차원과 입장에서 사고하고 구상하는, 말하자면 국가안보 일반참모부가 생겨났다는데 있다고 하겠다. 물론 국무부, 국방부 관리라고 하여 미국 전체의 이익이 아닌 각 부의 이익과 관료적 타성에 따라서만 대외정책, 군사정책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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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장군들⑧이병형] 살아있는 전술교범 ‘대대장’ 남겨···율곡계획 수립해 전력증강 초석마련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군인은 전공(戰功)으로 말한다. 그런데 전공은 운도 따라야 한다. 백선엽 대장은 전공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6.25전쟁의 영웅이다. 30대의 청년장군으로서 두 번의 참모총장, 두 번의 야전군사령관으로 7년반 동안 대장을 달았던 행운은 그 분에게 6.25전쟁이라는 무대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김종오, 김백일, 송요찬 등도 무대가 주어진 가운데 최선을 다했다. 이병형은 송요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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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가안보회의③한미 비교] 구성은 방대, 기능은 매우 소극적···안보 핵심인물로 내실 기해야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의 경우에도 역시 국가안보회의가 있으나 미국의 NSC에 비해 그 기능은 상당히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구성인원부터 미국과 같이 국가안보에 직접 관련되는 핵심인물들로 축소하여야 내실 있는 토의가 될 것이다. 또한 국가안보회의를 단순한 정책자문기구보다 안보정책 심의?의결기구로 강화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 점은 미국 NSC의 법적 지위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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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장군들⑦송요찬]1952년 전선방문 아이젠하워 놀래킨 한마디 “공격준비 완료입니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송요찬 장군은 4.19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다. 데모대가 경무대로 육박하는 가운데 급박해진 경찰이 실탄 지급을 요구해왔다. 당시 군은 M-1 소총을 주로 사용하였고 경찰은 칼빈 소총을 사용하였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에 M-1 소총 탄약을 지급도록 하였다. 물론 경찰은 이 탄약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이로써 경찰 발포로 인한 희생자를 줄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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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가안보회의②구성] 대통령 비롯 부통령·국무장관·국방장관이 정식멤버···합참의장·중앙정보국장 배석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NSC는 국가안보정책에 관하여 대통령에 조언하는 기관이지 정책을 심의 의결하는 기관은 아니다. 미국 헌법에 의하면 행정권(executive power)은 대통령에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의 경우 행정권은 정부(협의의 정부, 행정부)에 있으나, 미국 헌법은 정부가 아닌, 대통령에 행정권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내각(cabinet)이 헌법기관이 아니며 단지 각료들의 회의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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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장군들⑥백선엽] 다부동전투 영웅···1953년 한미방위조약 구상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스파르타의 3백 용사가 테르모필레의 협곡에서 페르샤의 대군을 막다가 전원 옥쇄한 기록은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다. 1950년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막아낸 1사단의 다부동 전투는 한국의 테르모필레였다. 다부동이 돌파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된다. 8월15일 다부동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30세의 청년장군이었던 사단장 백선엽은 부하들에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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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장군들⑤김백일]흥남철수때 북한동포 10만명 구출···1951년 3월 비행기사고 순직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김백일 장군은 흥남 철수시 북한 동포 10만명을 구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막상 전장(戰將)으로의 김백일은 민간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육군보병학교의 백일사격장의 유래를 아는 장교도 많지 않을 것이다. 김백일은 1950년 7월 김홍일의 뒤를 이어 1군단장에 기용되었다. 서울수복 후 북진이 시작되자 1군단은 10월1일 38선을 처음으로 돌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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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가안보회의①창설] 1947년 전후 초강대국 미국의 세계전략 수행 위해 설립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NSC)는 1947년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에 의해 설치되었다. 주 임무와 기능은 ‘국가안보에 관련되는 대내외정책과 군사정책을 통합(integration)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1947년의 국가안보법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불가불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미국이 적극적인 세계전략(global strategy)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체제 골격을 구성했다. 첫째가 국가안보회의의 설치,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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