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54년전 배우 윤정희의 위문편지…”그날, 전쟁터에 고향이 왔다”

배우 윤정희, 영화 <빗속에 떠날 사람>에 출연할 당시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얼마 전 국군의무학교장이던 정준규 대령이 전역했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문학을 좋아해 오래 전부터 마음을 나누어 온 친구다. 그는 대전보훈병원 피부과로 자리를 옮기며 오래 간직해 온 책 한 권을 내게 건넸다. “이 책은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 선생님이 보관하시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의 제목은 <남십자성에 남긴 우리들의 이야기>. 1987년 국군군의학교가 발간한 파월 의무장병들의 수기집이었다.

<남십자성에 남긴 우리들의 이야기> 표지 (황건 제공)

표지는 이미 누렇게 바래 있었다. 야자수가 우거진 열대의 숲, 적십자를 단 헬리콥터, 들것에 부상병을 옮기는 의무병들, 그리고 십자 표식이 새겨진 철모를 쓴 군의관의 얼굴이 펜화로 담겨 있었다. 전쟁을 다룬 책이지만 총을 겨누는 장면은 없었다. 생명을 살리려는 사람들의 손길이 표지 가득 살아 있었다.

이 책은 나에게 더욱 각별했다. 장인 송익훈 중령은 월남전 당시 비둘기부대 이동외과병원장을 지냈고, 귀국 후에는 국군군의학교장을 역임했다. 그분이 걸었던 길의 한 자락이 이 책 속에도 스며있는 듯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한 장의 편지 앞에서 멈추었다. 배우 윤정희가 1972년 9월 15일 파월장병들에게 보낸 글이었다.

배우 윤정희씨가 파월장병들에게 보낸 편지 <황건 제공>

“파월장병 여러분 안녕하세요. 정희예요.”

그 시절을 기억하는 내 또래라면 윤정희라는 이름만으로도 한 시대가 떠오른다. 윤정희, 남정임, 문희. 이른바 ‘트로이카’라 불리던 세 여배우는 1970년대 한국 영화의 얼굴이었다. 단아한 미소와 지적인 분위기를 지닌 윤정희는 많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편지에는 부산항을 떠나던 장병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적혀 있었다. 월남을 다녀온 장병이 30만 명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그들의 노고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화려한 스타의 인사말이라기보다, 먼 고향에서 안부를 전하는 한 사람의 편지처럼 읽혔다.

문득 영화 <님은 먼곳에>가 떠올랐다. 수애가 연기한 순이는 위문공연단의 가수가 되어 전장을 돌며 노래를 부른다. 영화는 허구지만 위문공연은 엄연한 역사였다. 수많은 가수와 배우들이 월남을 찾아 장병들을 만났고, 그들의 노래는 잠시나마 총성과 포연을 잊게 했다.

나에게도 작은 기억이 있다.

1976년과 1977년, 대학생이던 나는 여름방학마다 육군행정학교 문무대에서 열흘간 병영집체교육을 받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외부와 격리된 생활은 낯설고 답답했다. 어느 날 ‘여대생 위문공연’이 열렸다. 젊은 학생들의 노래와 율동이 이어지자 우리는 손뼉 치고 휘파람 불며 환호했다. 공연이 끝난 뒤 친구들과 웃으며 말했다.

“야, 우리도 군발이가 다 되었네.”

고작 열흘이었다. 그런데도 그 공연은 그렇게 반갑고 즐거웠다.

하물며 수개월, 수년 동안 정글 속에서 생활하던 스무 살 청년들에게 최고의 배우와 가수들이 찾아왔을 때의 감격은 얼마나 컸을까. 그들이 환호한 것은 연예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나마 전쟁터를 찾아온 고향이었고, 청춘이었으며, 가족의 안부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월남전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 평가와는 별개로,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견뎌야 했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잠시나마 달래 주었던 노래의 의미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책을 덮으며 다시 누렇게 바랜 표지를 바라보았다. 야자수 아래 적십자를 단 헬리콥터와 부상병을 옮기는 의무병들의 모습은 반세기의 세월을 견디고도 여전히 생생했다.

총을 든 병사들이 전쟁을 치렀다면, 의무병들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같은 전장을 걸었다. 그리고 위문공연은 그 생명을 돌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잠시 위로해 주었다.

누렇게 바랜 것은 종이뿐이었다. 그날 전쟁터를 찾아왔던 고향은,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늙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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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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