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람

스승 백상호 교수님께 바치는 생전 헌사

“교수님은 평생 ‘좋은 의사’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셨다. 좋은 의사란 타고난 성품, 가정교육, 기초교육, 전문교육, 올바른 직업관,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 서로 맞물려 완성되는 존재라고 보셨다.”

나의 박사 지도교수이신 백상호 교수님은 1934년생으로,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대장암 말기로 식사를 하지 못하시고 비경구 영양에 의존하고 계신다. 머지않아 이별의 시간이 올 것 같다. 이 글이 생전에 전해진다면, 사후의 추모사 대신 사모님께서 읽어주심으로써 마지막으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는다.

백상호 교수

내가 처음 교수님을 뵌 것은 1979년 3월 2일, 서울의대 의학과 진입식에서였다. 당시 신동운 학장께서 교수님들을 한 분씩 소개하시던 자리였다.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실습가운이나 어두운 정장을 입고 계셨지만, 백 선생님은 초록빛이 도는 콤비 재킷 차림이었다. 부교수로 승진하시고 학장보를 맡고 계시던 시기였는데, 단정하면서도 젊고 세련된 인상이 유독 또렷하게 남았다.

그해 나는 해부학 ‘머리와 목’을 교수님께 배웠다. 강의는 놀라울 만큼 체계적이고 따뜻했다. 얼굴 도식 위에 혈관이 그려진 투명 필름을 겹쳐 오버헤드 프로젝터로 비추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 붉은 연필로 그리며 자연스럽게 목동맥의 가지들을 익혀갔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구조가 눈과 손을 통해 몸에 새겨지는 경험이었다. 그때의 노트는 이후 성형외과 수련 과정에서도 해부학을 다시 확인할 때마다 꺼내보던, 나에게는 작은 해부학 교과서였다.

실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두피의 다섯 층을 배우던 날, 교수님은 신경외과와 방사선과 교수님들을 초청하여 두부 외상과 경막외·경막하 출혈의 영상 소견까지 함께 설명하게 하셨다. 이어 어린아이의 두피 손상 사례를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발표와 토의를 맡기셨다. 그 순간 해부학은 더 이상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임상으로 이어지는 언어가 되었다.

졸업 후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성기준 교수님과의 인연으로 해부학교실에서 학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1988년, 석사 과정이 끝나갈 무렵 스승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백상호 교수님께서는 자신이 존경하던 스승의 마지막 제자인 나를 받아주시고, 박사 과정까지 이끌어 주셨다.

논문을 쓰며 나는 비로소 ‘논문 작성’이라는 학문의 문법을 제대로 배웠고, 그것은 이후 내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황건이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내가 받은 가장 큰 칭찬이었다.

교수님은 평생 ‘좋은 의사’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셨다. 좋은 의사란 타고난 성품, 가정교육, 기초교육, 전문교육, 올바른 직업관,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 서로 맞물려 완성되는 존재라고 보셨다.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과 더불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함께 갖추어질 때 비로소 의사는 신뢰를 얻는다고 하셨다.

이러한 신념은 제도 개혁으로 이어졌다. 교수님은 우리나라 의사 국가시험에 ‘지식’뿐 아니라 ‘술기’와 ‘태도’를 평가하는 실기시험을 도입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셨다. 또한 해부학에서는 면역조직화학 기법을 국내에 도입하였고, 한자 중심의 용어를 쉬운 한글 해부학용어로 바꾸는 작업을 주도하셨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성과를 넘어, 의학 교육의 언어와 방법 자체를 바꾸는 일이었다.

2001년 정년퇴임식에서 교수님은 “소나무 두 그루를 키우겠다”고 말씀하셨다. 해부학과 의학교육 두 그루의 소나무 약속은 지켜졌다. 아흔에 이르기까지 후학들을 지도하고 격려하시며, 제자들을 매년 초대해 식사를 베푸셨다. 재작년에는 덕구온천에서 제자들에게 숙식까지 마련해 주셨다.

이제 그 모임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텅 빈 듯하다. 그러나 교수님이 심어 놓으신 소나무는 여전히 자라고 있다.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길러내며 ‘좋은 의사’를 만들어간다면, 우공이 산을 옮기듯 그 뜻은 끝내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이 글이 교수님께 닿을 수 있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선생님,
저희는 아직도 선생님이 그려주신 해부학의 선 위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은, 결국 사람을 향해 이어지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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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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