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우근 칼럼] 겨자씨와 누룩

종교의 자리와 신앙의 자리는 멀고 멀다. 정치와 종교가 악령의 누룩이라면, 신앙은 겨자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새들이 둥지를 트는 큰 나무로 자라난다(마태복음 13:31~32). 새들이 깃들인다는 것은 여러 민족,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본문에서. 사진은 겨자씨

철학은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존재론‧인식론‧실천론의 세 분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존재론은 생명과 실재의 근원을 탐구하고, 인식론은 진리를 깨닫는 의식을 파헤치며, 실천론은 삶의 참된 길을 찾아 나선다. 길은 실천론의, 진리는 인식론의, 생명은 존재론의 핵심 주제다.

예수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밝혔다(요한복음 14:6).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 안에서 삶과 죽음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다. 그리스도가 참된 삶의 길이요, 진리를 밝히는 등불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너머의 초월세계가 아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이루는 현실의 세계다(마태복음 6:10). 그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밀가루 속에 누룩을 조금만 넣어도 밀 덩어리가 크게 부풀어 오른다(누가복음 13:20~21). 적은 양으로 전체를 변화시키는 전면적 혁신, 단순한 외적 확장을 넘어 존재 자체를 쇄신하는 질적 변혁이다. 빵 안에 들어간 누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빵을 안에서 부풀린다. 적은 누룩이 전체를 변화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꽹과리를 울리며 요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고요하고 은밀하게 다가와 마치 적은 누룩처럼 우리의 내면에 고루 퍼진다. 그리스도 신앙은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권력도, 인간의 마음을 옥죄는 종교권력도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삶을 쇄신하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과 같은 존재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너머의 초월세계가 아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이루는 현실의 세계다(마태복음 6:10). 그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밀가루 속에 누룩을 조금만 넣어도 밀 덩어리가 크게 부풀어 오른다(누가복음 13:20~21). 적은 양으로 전체를 변화시키는 전면적 혁신, 단순한 외적 확장을 넘어 존재 자체를 쇄신하는 질적 변혁이다. 빵 안에 들어간 누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빵을 안에서 부풀린다. 적은 누룩이 전체를 변화시킨다.-본문에서. 사진은 누룩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만 누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악령의 세계에도 누룩이 있다. 악령은 빛나는 천사의 얼굴로 다가와(고린도후서 11:14) 고요하고 은밀하게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마치 누룩처럼 눈에 띄지 않게 우리 마음 안으로,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든다. 은밀하지만 점진적으로 퍼지는 악령의 누룩은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부패, 공동체를 오염시키는 위선이다(출애굽기 12:15, 고린도전서 5:6).

황제가 신의 자리에 앉은 로마의 식민통치, 에돔 출신 이방인 헤롯 왕가의 세습 통치, 그들과 결탁한 성전 권력… 이들이 얽히고설킨 정치와 종교의 복합적 지배체제 아래에서 예수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했다(마가복음 8:15).​ 여기의 누룩은 고요하고 은밀하게 우리의 내면에 퍼지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아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겉모습은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자기 의(義)로 가득한 교만, 종교적 위선이고(로마서 10:3), 헤롯의 누룩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뿌리인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에 빌붙어 자기의 세속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적 기회주의다.

하나님 나라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다르지 않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종교적 교만으로, 헤롯의 누룩은 정치적 위선으로 진리를 거스른다. 부풀어 오르는 성질을 가진 누룩은 죄의 영향력인 부패와 타락을 상징한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예수의 경고는 종교적 교만과 정치적 위선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이다. “인간은 자기의 선(善) 때문에 더 악(惡)해질 수 있다!” 교만하고 위선적인 종교인들에 대한 종교사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의 경고다.

죄인을 향한 용서와 사랑이 없는 선은 신앙의 선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은 모든 종교가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 종교예식이 장중하고 종교색채가 현란하기 그지없는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의 신념이다.

종교의 자리와 신앙의 자리는 멀고 멀다. 정치와 종교가 악령의 누룩이라면, 신앙은 겨자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새들이 둥지를 트는 큰 나무로 자라난다(마태복음 13:31~32). 새들이 깃들인다는 것은 여러 민족,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not yet)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시작되었다. 작고 은밀한 시작이 크고 영광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에는 매우 크게 되리라(욥기 8:7). 크리스천은 악령의 누룩, 위선과 교만의 누룩을 버리고 생명의 겨자씨가 되는 삶으로 나아간다. 종교의 제도와 의식을 넘어 신앙의 깊은 자리로 들어간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가 2천 년 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 삶 속에 그리스도가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 신앙이다. 광야로 나아가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회상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광야에 흘러넘친 예수의 피가 지금 내 마음을 뜨겁게 적시는 것이 믿음이다.

겨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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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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