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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25] 하바롭스크 ‘죽음의 계곡’에서 만난 고려인 지식인 ‘조명희’

아무르강 ‘죽음의 계곡’ 기념비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죽음의 계곡’ 기념비에서 우리는 고려인(러시아 국적 조선인) 역사의 아픈 상처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된다. ‘조명희(러시아어, Чо Мен Хи)’라는 이름이다. 하바롭스크 어딘가에서 총살되어 아무르강으로 사라져 버린 또 한 명의 조선 지식인, 조명희였다.

조명희는 누구이며, 어떻게 러시아로 망명했고, 왜 ‘죽음의 계곡’에서 비극을 맞이했는가?

‘포석 조명희(1894~1938)’는 구한말 전형적인 근대 지식인이었다. 충북 진천군 벽암리 농촌에서 출생한 조명희는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경성으로 올라와 중앙고보(현 중앙고등학교)를 다녔다. 방황 속에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3·1운동 이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学) 철학과에 유학했다. 일본에서 작가 김기진(팔봉)과 만나 깨어 있는 근대 지성으로 희곡·시·소설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

조명희 초상,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조명희의 실천적 지성은 식민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수탈받는 현실을 목도하며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열악하기만 한 조선의 노동자와 농민의 참상은 그를 깨웠다.

그의 예술 활동은 초기의 순수한 진리와 미적 탐구에서 참여하는 행동문학으로 변화하게 된다.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문학으로 타개하려 했던 그는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식민지 민중의 고통을 폭로하고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예술을 무기로 정치적 사회 변혁을 내걸고 활동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언론인 김기진(팔봉), ‘고향’의 작가 이기영, ‘탈출기’를 쓴 최서해 등과 함께 카프(KAPF)를 주도하며 1927년 ‘낙동강’이라는 카프 문학의 걸작을 발표한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그는 소련으로 망명을 결심했다.

1928년 두만강을 거쳐 고려인 선조들이 지나갔던 훈춘길을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입국한다. 이미 러시아는 소비에트 공화국 체제로 변화되어 사회 곳곳에 공산주의 체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명희가 교사로 일한 초등학교, 우수리스크 푸칠로프카

망명한 조명희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고려인 활동의 중심지 우수리스크로 이주한다.

그는 고려인 집단 거주지인 육성촌 ‘푸칠로프카’ 고려인 마을에서 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동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고려인 신문 ‘선봉’의 발행과 집필에 참여하고 문학 활동을 이어가며 고려인 문학가 후진들을 양성했다. 여기서 그는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의 활동은 소련작가동맹 극동지부의 핵심 인물이 될 정도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소련작가동맹의 초청으로 극동의 중심지 하바롭스크로 이주하게 된다. 현재 칼 마르크스 거리 중심가인 콤소몰스카야 거리 89번지 아파트에 거주하며 왕성한 문필 활동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발행되던 잡지 ‘선봉’의 주필로 활동하며 극동 작가동맹의 중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필자가 조명희가 산책하며 망향가를 부르던 아무르 강가를 가리키고 있다.

조명희 작가는 매일같이 아무르강 변을 거닐며 조국 강산을 그리며 망향가를 불렀고 민족 독립의 글을 구상했다. 낮에는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소설 ‘만주 빨치산’을 집필하였다. 하바롭스크 중심가 붉은 벽돌의 고색창연한 건물들 속에 그가 구상하던 문학의 정신이 남아 흐르고 있다.

그가 누린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소련 입국 8년 만인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이 고려인 사회에 몰아치며 아무르강처럼 검푸른 비극이 그를 덮쳤다.

1937년 9월 그는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자택에서 내무인민위원부(NKVD)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8개월간의 심문과 고문 끝에 1938년 4월 사형선고를 받았고, 같은 해 하바롭스크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시립묘지 비극의 흔적, 조명희(위에서 세 번째 러시아어) 이름이 보인다.

고려인 지도자급 인물들은 대거 검거되어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 동시에 연해주 일대 고려인 약 17만 명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시립묘지 공동비석에도 수천 명의 희생자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 조명희의 이름도 확인된다.

스탈린 사망 이후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이 재조명되었다. 조명희 역시 1956년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되었다. 명예회복과 함께 소련작가동맹 회원으로 복권되었고,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는 1988년 ‘조명희 문학관’이 세워졌다.

하바롭스크의 랜드마크, 성모승천 대성당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조명희를 기리는 문학비가 세워졌고, 고향 진천에도 ‘조명희 문학관’이 2015년 개관되었다. 2019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고려인 문학의 태두 역할을 한 포석 조명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조명희의 삶은 근대 조선 민족적 지식인의 전형적인 인생 역정이었다.

조선 농촌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적 지성을 얻었고,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저항의 카프 문학 활동은 러시아 망명으로 이어졌다.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민족 문학과 투쟁의 길을 걸었지만 스탈린 독재 체제 아래에서 비극적 생의 마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조명희가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일깨웠던 푸칠로프카 학교 건물은 지금도 남아 우수리스크 외곽에서 러시아 초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해맑은 러시아 어린이들이 그의 꿈속에서 또 다른 21세기의 주역이 되고 있다. 그의 인생은 짧았지만 그의 문학은 지금도 살아 있다.

강변에 울려 퍼진 그의 망향가를 떠올리며 우리는 아무르강(흑룡강) 너머 만주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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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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