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소련 강제억류 피해자 유족의 20년 기다림
최근 대통령이 과거 방송 보도와 관련해 사과를 요구하자 언론노조는 언론 자유를 강조하며 반발했다. 권력 감시와 언론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 국가의 답을 20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국민도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구소련 강제억류 피해자 유족 문용식 씨를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 고 문순남(1924~1974)은 일제 말기 강제동원으로 만주 선양으로 끌려갔고,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소련군에 의해 억류되어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 등지에서 약 3년 이상 강제노동을 했다.
1949년 귀국했지만 조국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지 못했다. 귀국자들은 적성국 지역에 체류했다는 이유로 보안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사회적으로도 불이익을 받았다. 문순남 씨는 명예회복을 받지 못한 채 1974년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함께 억류되었던 남한 출신 피해자 수백 명 역시 모두 별세했고, 이제 남은 것은 기록과 유족뿐이다.
문용식 씨는 20년 넘게 외교부, 행정안전부, 국회, 청와대 등에 민원을 제기하며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명확한 답이 아니라 부처 간 이송과 책임 회피였다. 며칠 전 그는 또 같은 일을 겪었다.
행정안전부는 그의 민원을 재외동포청으로 이송했다. 이유는 “해외 거주 사안과 관련된 민원”이라는 것이었다. 민원 내용을 검토했느냐고 묻자 “구체적인 검토 없이 이송했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재외동포청 역시 사안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오히려 문씨에게 “어느 기관에서 처리해야 하는 사안이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문씨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 판단은 정부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실제로 민원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다시 떠돌았다. 3월 19일 18시 10분, 재외동포청은 행정안전부로 민원을 재이송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송 사유의 연관성을 검토했으나 재외동포청 소관 사안으로 보기 어렵다. 청원 내용은 한일청구권 협정 해석, 대외관계, 국제법적 검토가 수반되는 사안으로 관계 부처 협의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재외동포청 업무 범위를 벗어난다고 판단하여 이송한다.”
다음 날인 3월 20일 오전 9시 20분,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다시 외교부로 민원을 넘겼다.
“청원인이 외교부에 수차례 제기한 사안이며 국제법 위반 문제를 주장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및 재외동포청으로 이송된 데 대해 강한 이의를 제기하여 청원법 제15조 제2항에 따라 외교부로 이송한다.”
결국 외교부, 행정안전부, 재외동포청 사이에서 민원은 또 한 번 떠돌았다. 부처는 서로를 가리켰고, 누구도 책임 있게 답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문용식 씨는 이렇게 말했다. “억류 피해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20년 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느 부처로 보낼지 고민하기 전에 국가가 책임질 것인지부터 답해 주십시오.”
이 문제는 단순한 해외동포 문제가 아니다. 해방 이후 국가가 해결하지 못한 역사 문제이며,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다. 언론 자유는 중요하다. 권력 감시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국민의 호소가 20년 넘게 부처 사이를 떠돌고 있다면, 그 또한 국가가 답해야 할 일이다. 권력은 사과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답해야 할 책임도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민원번호를 들고 다음 기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문용식 씨에게 내용 중 수정하거나 보완할 부분이 있는지 확인을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3월 19일부터 20일 사이 재외동포청 → 행정안전부 → 외교부로 민원이 다시 이송됐다는 통보 메일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어느 부처가 처리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6년 3월, 이재명 정부 출범 10개월. 대한민국 행정이 국민 앞에 보여준 또 하나의 장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