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성균관대 김정탁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현확 전 총리와 많은 시간을 이야기한 사람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날카로운 논설위원이기도 했다.
“신현확은 어떤 인물이라고 평가해?”
“먼저 행정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고건 총리와 비교해서 말하지.”
그는 칼럼니스트답게 논리적이었다. “고건 총리는 정책을 추진할 때면 위원회에 회부하기도 하고, 여론을 예민하게 살피는 스타일이었지. 같은 행정의 달인이라고 해도 신현확 총리는 그 반대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여론을 살피지 않고 그냥 돌진한다고 할까. 그 통찰력과 판단이 나중에 보면 다 맞아떨어진다는 거야. 다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데도 우겨서 의료보험제도를 만든 것도 그렇고 말이야.”
“만나 보니까 성품은 어떤 것 같아?”
“이미 잘 알려져 있잖아?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총을 그대로 가지고 협박하는 김재규에게 맞섰지. 12·12 군사반란 때 총격 현장에 가서 비겁하게 숨어 있던 국방장관을 끌어냈잖아? 내가 인터뷰할 때 정말 강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어. 남들한테는 얘기 안 했지만.”
“그게 뭔데?”
호기심이 일었다.
“한번은 내가 요즘 최규하 대통령이 자서전을 쓰고 계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지. 그랬더니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회고록을 쓸 게 뭐가 있겠어. 그 등신이’라고 하시는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대외적으로는 절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깊은 속마음이 순간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것 같았다.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이 내민 서류에 결재를 해서 명분을 만들어준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역사의 고비마다 정면승부를 걸었던 대단한 분이야. 자유당 정권 당시에도 부흥부 장관을 하다가 부정선거에 얽혀 감옥생활을 했지. 특이한 건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자기가 한 말들을 다 녹음하게 한 거야. 세상에 말이 안 통하니까 그랬던 것 같아. 아들 신철식이 녹음한 그 릴테이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도 살펴봐.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하자고.”
다음 날 밤, 나는 자료들이란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돌아갔다.
1960년 3월 15일 밤 10시경. 신현확 장관은 중앙청 회의실에 마련된 개표 현황판을 보고 있었다.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과 장면의 선거 결과였다. 서울과 가까운 양주부터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기붕 후보 630표에 장면 후보 5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전통적인 야당의 텃밭인 대구의 개표 결과가 들어왔다. 이기붕 후보 5,000표에 장면 후보 32표였다. 부정선거가 분명했다. 대구에서 야당표가 1할도 안 나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가 함께 선거 결과를 보던 다른 국무위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정식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추궁해야 합니다.”
선거를 담당하는 내무장관의 얼굴이 순간 찌그러졌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선거에서 신현확 장관을 배제시켰다. 부흥부 장관인 그 역시 정치문제에 관여할 여유가 없었다. 전란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그가 담당한 경제란 ‘죽고 사는’ 문제였다.
그 무렵 정치 르포라이터 송우 씨는 선거를 앞두고, 경북 출신인 신현확 장관이 대구에 가서 강연을 하면서도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젊은 장관의 모습을 평가했었다.
정식 회의가 소집되고, 밤 12시에 국무회의가 시작됐다. 그가 먼저 발언했다. “저는 이 개표 결과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부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느냐는 말이에요.” 국무회의가 술렁였다. 신현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권력의 실세 이기붕을 찾아가 사임하라고 했다.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혁명이 일어나고 민주당 정권으로 바뀌었다. 부정선거의 피해자였던 장면이 총리가 됐다. 부정선거 관련자를 처벌하는 법이 만들어지고 수사가 시작됐다. 부정선거의 원흉들을 내란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기사가 신문의 1면을 뒤덮었다.
고향 친구들이 집에 칩거하고 있는 그를 찾아와 말했다. “강원도 깊은 산속 절에 피난처를 꾸려놨으니 일단 몸을 피하게.” 주위에서 걱정들이 많았다. 집 앞 벽에 누군가 ‘원흉’이라는 글씨를 적어놓고 갔다.
장관 시절 심복 부하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 말했다. “지금 여론이 장관님을 내란죄로 극형에 처하라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일단 쏟아지는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검찰은 그를 밤 9시에 서대문형무소 소장실로 출두하라고 통보한 상태였다. 선택의 기로였다.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정선거에 관련이 있든 없든, 그것을 알았든 몰랐든 국무위원으로 책임져야 할 게 있다면 응당 져야지! 그게 설사 사형이라도 말일세.”
신현확은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 식사를 하고, 출근할 때 늘 입고 다니던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후 집을 떠났다. 부정선거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체포를 피해 도피한 상태였다. 2평도 안 되는 감방 안에서 그는 9명의 잡범들과 함께 있었다. 잡범들은 그를 부정선거의 원흉이라고 하면서 침을 뱉고 따귀를 때렸다. 주먹이 날아왔다. 의도적으로 그를 잡범들 방에 넣은 것 같았다.
어느 날 오전 10시경이었다. 교도관들이 감방을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정좌하고 앉아!”
장면 총리가 시찰을 왔다는 것이다. 그와는 수없이 대면했던 사이였다. 이윽고 장면 총리가 나타났다. 그는 부정선거 관련자가 들어 있는 방만 골라서 들여다보았다. 그냥 잠시 둘러보는 게 아니었다. 안에 갇힌 사람을 몇 분씩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집권했으니 너 이놈들 한번 두고 봐라.’
장면 총리가 신현확이 갇혀 있는 감방 앞으로 왔다. ‘철컹’ 하고 둔탁한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렸다. 양복을 입은 검은 실루엣이 신현확의 시야에 들어왔다. 차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어떤 말도 없었다. 신현확은 단 한순간도 장면 총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딱딱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장면 총리의 발소리가 멀리 희미해졌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사람이 고작 이런 수준밖에 안 된단 말인가.’ 신현확은 장면 총리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조차 위선으로 느껴졌다. 검사는 그를 부정선거에 협조했다면서 기소했다.
한편 2008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스산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선릉역 부근의 빌딩 지하에 있는 우호재단 사무실로 갔다. 신현확 전 총리의 호를 이름으로 한 법인이었다. 사무실에는 친구 신철식이 앉아 있었다. 퇴직한 그는 재단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구석, 먼지가 묻은 오래된 녹음기 쪽으로 시선이 갔다. 우리가 어린 시절 보던 커다란 릴 테이프가 마주 보며 돌아가던 육중한 기계였다.
“4·19 후 아버지가 재판을 받을 때, 어머니랑 007 가방보다 더 두껍고 무거운 저 기계를 들고 법정에 들어가 아버지의 말을 녹음했었어. 아버지가 시켰지. 한마디도 빼놓지 말라고. 그 테이프를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어. 그 시절 법정에서는 녹음을 막지는 않았어. 너한테 준 자료 더미 속에 녹취록도 들어 있을 거야.”
“그때 왜 녹음을 했는데?”
“당시 아버지는 그래도 한편으로 언론을 믿었어. 그런데 전혀 아니었던 거야. 언론이 아버지를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매도하고, 학계 인사들이 칼럼이라고 내놓은 글들이 가관이었어. 아버지는 직접 진실을 말로 남기기로 하고, 그 녹음을 어머니와 내게 시켰던 거야. 그 테이프를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어.”
사회적 이슈가 터지면 언론이 뼈도 추릴 수 없게 매질하고,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키는 풍토는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때 가족들은 어땠어?” 장관에서 하루아침에 역적이 됐다. “4·19 이후 매일같이 데모가 있었잖아? 엄마와 초등학생인 나만 집에 있는데, 하루는 데모대가 집 안까지 쳐들어온 거야. 온 집안을 휘저어놓고 직성이 안 풀렸는지, 내가 먹고 있던 사과를 빼앗아 내동댕이치고는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후려치면서 ‘이, 원흉의 새끼!’라고 했어. 집으로 편지들이 날아드는데 겉봉에는 ‘신현확 원흉 귀하’라고 쓰여 있었어.”
고등학교 시절 그는 그 얘기를 친구인 내게 했었다. 한이 맺힌 듯했다. “밖에 나가면 아이들이 나를 보고 ‘원흉의 자식’이라고 놀리는 거야. 아버지가 감옥에 있다고 소리치면서 시비를 거는 놈들이 많았어. 한 번은 아버지를 걸고 놀리는 놈을 끌어안고 높은 계단에서 같이 떨어진 적도 있어.”
“그때 어머니는 어떻게 사셨어?”
“그때 어머니가 서른다섯 살이었어. 대접받던 장관 부인이 하루아침에 역적의 계집이 된 거지. 남편은 사형을 당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닥친 거야.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졌어. 아버지가 말렸는데도 남편을 죽게 할 수 없다고 변호사를 찾아다녔어. 나를 데리고 아버지의 대학 선배인 민복기 변호사를 찾아갔었어. 어린 내가 무릎을 꿇고 우리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했다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가 돈을 꾸어 탁구장을 차렸어. 시간당 15환을 받았지. 탁구장에 온 사람들이 뒤에서 ‘저 여자가 장관 부인이었대’ 하고 수군거렸지. 어머니는 들은 체도 안 했어. 그리고 집의 빈방을 이용해서 학생들 하숙을 쳤어.” 그 말을 듣고 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야, 고등학교 1학년 때 너희 집 대단했잖아? 쌍용그룹 회장님이라는 소문이 나고 말이야.”
“너한테 자랑했던 그 집은 아버지가 쌍용그룹 경영을 잠시 맡았을 때, 그룹 오너가 해준 집이었어. 대지 300평에 잔디 정원이 있고, 홈바까지 있는 호화로운 집이었지. 나도 그때 처음 그런 집에서 살아봤어. 그래서 너한테 자랑했던 거지.”
그의 얼굴에 뭔가 떠오르는 표정이 지어졌다.
“참, 아버지 최후 진술을 담은 그 녹음 때문에 나중에 굉장한 반전이 있었어. 자료를 더 살펴봐.”
반전? 나는 궁금증을 안고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 며칠 동안 나는 자료들과 씨름했다. 녹취록을 읽고, 오래된 신문 스크랩을 뒤적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50년 전 그날 밤, 서대문형무소로 향하던 한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1960년 5월 3일이었다. 밤 9시까지 서대문형무소로 오라는 통보를 받은 신현확이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집을 떠나면 절대 면회 오지 마시오. 마지막 가는 길, 마음 편히 홀가분하게 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
순교자 같은 단단한 마음을 먹었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절대 변호사를 선임하지 마시오. 변호사란 자기 죄를 변명하고 형을 낮추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저들에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도 전혀 없소. 변호사를 쓰는 것부터가 구질구질한 일이오.”
그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번졌다. 그가 덧붙였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굴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 모르지만, 절대로 비굴한 모습은 보이기 싫소.”
그 얼마 후 민복기 변호사가 감옥에 있는 신현확을 찾아갔다.
“저는 변호사를 희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얘기는 들었네만, 남은 가족들 입장은 또 그게 아니지 않은가?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내 앞에서 아버지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더구만.”
그의 가슴이 울컥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켰다.
“결말은 뻔히 정해져 있는데 변호가 무슨 소용입니까? 지금 민주당 쪽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것들을 싹 쓸어 없애야 우리가 잡는다’는 식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건 각본대로 가는 정치재판입니다. 괜히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재판 때가 되면 간수들은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인 그를 서소문 법원 앞을 걷게 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했다. 법정에서 검사도 판사도 그에게 얼음같이 대하며 야유를 퍼부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재판장과 당당히 시선을 마주쳤다. 불리해도 진실이면 그대로 말했다. 그러나 세상은 진실을 원하지 않았다.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중에 5·16이 터졌다. 혁명재판소가 설치됐다. 다시 재판을 한다고 했다.
1961년 7월 29일, 혁명재판이 시작됐다. 재판은 정해진 결론을 향해 격류같이 흘러갔다. 혁명검찰은 내무장관과 치안국장, 그리고 자유당 기획위원들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검사의 입에서 ‘사형’이라는 말이 떨어질 때마다 방청석에서는 비명과 탄식,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고인들은 최후 진술을 하시오.” 재판장이 말했다. 피고인이 된 국무위원들이 차례로 한 발짝씩 앞으로 나서 말했다. “재판장님, 나쁜 의도로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선의로 했습니다.” “재판장님, 형무소에서 많은 반성을 했으니 부디 선처해 주십시오.” “재판장님, 저는 절대 자유당 정권을 지지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장면 씨를 지지했다니까요.”
재판장의 눈에서 순간 경멸의 빛이 흘렀다. 몽둥이를 본 개처럼 그들은 벌벌 떨었다. 그들의 맺음말은 하나같이 “관대하게 처분해 주십시오”였다. 그런 말들을 듣는 신현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간성의 바닥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장관을 했다는 사람들의 비굴하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신현확의 차례가 왔다. 그가 앞으로 나섰다.
“자유당 정권에서 조직적인 선거부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나라가 뒤집어진 게 사실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자유당 정권의 국무위원을 지낸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누가 지겠습니까? 나는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십시오. 그만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고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내가 안 한 것을 했다고는 만들지 마시오. 내가 몰랐다고 한 것은 모르는 것이고, 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하지 않은 것이오.”
방청객이 술렁거렸다.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에서 하얀 눈물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만일 국무위원으로 일할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나는 지금까지 해온 것과 똑같이, 그대로 하겠소.” 법정 두 곳에서 녹음기의 릴 테이프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가족과, 또 다른 한 곳에서 은밀히 녹음이 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