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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신현확…의료보험 도입해 ‘가난한 시인’도 병원 갈 수 있는 ‘나라’ 만든 장본인

박정희와 신현확.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는 1976년 신현확이 보건사회부 장관 시절 입안해 박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도입됐다.

강태기 시인이 혼자 죽어가고 있었다. 임대아파트 작은 방에서 법률상담을 하러 갔던 내게 그가 말했다. “저는 우리의 복지정책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저 같은 가난한 사람에게 편히 누울 수 있는 임대아파트도 주고, 병원에서 치료도 해 주고.” 진심이었다. 소년 자동차 수리공으로 두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된 천재 시인. 그가 마지막 순간에 감사한 것은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1970년대, 한 장관의 뚝심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1976년 가을 정부종합청사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의료보험제도의 도입 안건을 놓고 팽팽한 논쟁이 벌어졌다. “병원비가 너무 비싸 국민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약국에서 약을 사 먹거나 침을 맞는 정도입니다. 경제는 성장한다고 하면서 복지가 너무 뒤떨어지면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사회가 파괴됩니다. 더 이상 의료문제를 방치하지 말고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합니다.”
제안자인 신현확 보건사회부 장관의 말이었다.

“국가의 재정 형편으로 봤을 때 시기상조입니다.”
남덕우 부총리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돈이 들어가는 보험은 안됩니다. 국민소득수준이 더 올라가는 80년대에나 해야 할 사항입니다.”
재무부 장관이 거들었다.

“의료보험료를 강제로 징수하면 기업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지금도 인건비 부담을 호소하는데 여기에 보험료까지 떠안으라고 하면 중소기업들은 버티지 못합니다.”
상공부 장관도 거들었다.

“수출 드라이브를 걸어야 하는 시점에 기업에 부담을 지우는 건 경제정책과도 맞지 않습니다. 독일이나 일본은 이미 선진국이 된 뒤에 도입한 제도 아닙니까?“
남덕우 부총리가 결론을 내듯이 다그쳤다.

신현확 장관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우리의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요강에는 ‘복지사회를 지향한다’라는 내용을 넣었잖습니까? 우리에게 제일 다급한 복지가 뭡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아플 때 치료를 받는 것 아닙니까? 의료보험은 절실한 시대적 요청입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졌다고 하면서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수 없다면 경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현확 장관의 주장에 반대하는 국무위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국회에서도 야당의 반대 성명이 나왔다.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다. 민주주의는 억압하면서 의료보험으로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 한다.’

신현확 장관은 고민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처한 정치 사회적 상황은 좋지 못했다. 유신으로 장기 집권체제를 만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주화운동 세력과 학생운동권의 반발이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그를 보사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사전에 그에게 의견을 물었으면 장관직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는 할 수 없이 장관직을 받아들였다. 당시 보건사회부는 노사문제, 의료등 어려운 현안을 안고 있는 부처였다.

신현확 장관의 고민은 달랐다. 정치적 계산을 떠나, 그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에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제도의 출발이 어떻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국민들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는 발전했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배가 고팠다. 경제성장의 크기에 비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계층 간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빈곤층을 위한 복지정책이 절실했다.

가장 시급한 복지는 의료였다.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게 사회와 국가가 안전해지는 방법이었다. 의료보험은 소득 재분배의 효과가 있고 저소득층에게 상대적으로 혜택이 많이 가는 특징이 있다.

그는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의료보험에 관한 자료를 구하고 담당자의 설명을 듣게 했다. 세계각국의 자료들을 수집했다. 64종의 자료들을 장관 책상에 쌓아 놓으니까 높이가 1미터였다. 그는 그 자료들을 꼼꼼하게 검토했다. 퇴근 때에도 가방 가득히 그 자료들을 넣고 집으로 가져가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사회보험제도를 시행하면서 기업가들에게 말했다. 사회적인 보험제도를 반대하면 나중에 국가가 기업가를 지켜주기 힘들 것이라고. 그건 나중에 ‘안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밤마다 외국 의료보험 서적을 탐독한 것은 상부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

장관이 솔선수범하며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자 부정적이던 부처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모든 직원들이 연구하고 통계를 만들고 선진국 사례를 찾아 나섰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신현확은 청와대를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의료보험을 할 때가 됐습니다. 남북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체제를 안정시키려면 정부가 더 이상 의료문제를 방치하면 안됩니다.”

대통령이 심각한 얼굴로 반문했다. “지금 우리 재정형편으로 봤을 때 시기상조라고 하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의료보험은 국민 생활에 직결되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악기의 줄은 너무 팽팽하게 조여도 끊어지지만 너무 느슨하게 풀어놓아도 음악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복지와 경제성장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흠…”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생각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허락을 하지 않으면 사표를 제출할 예정이었다. “한번 추진해 보시오” 대통령의 허락이 떨어졌다.

추진력을 얻은 그는 의료선진국의 의료보험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연구팀을 각국에 파견했다. 해외로 파견된 연구팀이 질병별 보험수가와 병원에서 받는 가격을 일일이 조사해서 보고서를 제출했다. 장관인 그는 그 보고서들을 꼼꼼하게 대조하며 연구했다. 그런 연구와 수많은 토론을 거쳐 한국적 현실에 맞는 의료보험안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국회 통과는 또 다른 난관이었다. 1977년 초, 법안 심의가 시작되자 재계는 집단 반발했다. 경총은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며 공식 성명을 냈다. 의료계도 혼란을 우려했다.

신현확 장관은 전국을 돌며 설득에 나섰다. 기업인 간담회, 의사협회 설명회를 반복했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여러 곳을 돌았다. 목이 쉬고 다리가 부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밤에는 국회의원들을 개별 접촉해 설득했다. “처음엔 500인 이상 사업장만 적용합니다. 단계적으로 확대하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국회의원들과 헤어지고 나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이 떨렸다. 이제 시작이었다. 재계, 의료계의 반대를 뚫어내야 했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몫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도 병원에 갈 수 있는 나라.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는 차창 밖 서울 거리를 바라보았다. 저 거리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결심을 다졌다.

1977년 7월1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의료보험이 실시됐다. 첫날부터 병원마다 긴 줄이 늘어섰다. “평생 처음 병원에 와봤습니다”라는 50대 농부. “애가 아파도 참았는데 이제 마음 놓고 데려올 수 있어요”라는 젊은 엄마. 보사부에는 감사 전화와 편지가 하루 100통 이상 쇄도했다. 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10년 전 병원비 없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라도 이런 제도가 생겨 감사합니다.”

국민들의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 나서 경호실 수행요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현확, 보사부 장관 시키기 참 잘했어.”

신현확 장관의 아들 신철식은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아버지 서재를 가득 메운 게 의료보험제도에 관한 서적들이었어. 아버지는 수십권의 영문판, 일어판 서적들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밤마다 들여다 봤는데 며칠 후에 가보면 또 다른 책이 놓여 있었어.” 그가 아버지의 집념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비서관의 말을 들으니까 장관실에도 그만큼 책이 쌓여 있다고 하더라구. 아버지가 얼마나 애정과 정성을 쏟았는지 나는 알지. 그 무렵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도 입만 열면 의료보험이었고 완전히 전문가 수준이 됐지.” 그 일로 대통령의 인기가 올라갔다. 대통령은 1978년 12월 그를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기용했다.-본문에서 <이미지는 AI 생성>

신현확의 아들 신철식은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아버지 서재를 가득 메운 게 의료보험제도에 관한 서적들이었어. 아버지는 수십권의 영문판, 일어판 서적들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밤마다 들여다 봤는데 며칠 후에 가보면 또 다른 책이 놓여 있었어.”

그가 아버지의 집념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비서관의 말을 들으니까 장관실에도 그만큼 책이 쌓여 있다고 하더라구. 아버지가 얼마나 애정과 정성을 쏟았는지 나는 알지. 그 무렵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도 입만 열면 의료보험이었고 완전히 전문가 수준이 됐지.”

그 일로 대통령의 인기가 올라갔다. 대통령은 1978년 12월 그를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기용했다. 박정희와 경제 수장이 된 신현확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걸 상징하는 것이 담배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절대적 권력자가 되자 사람들이 감히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신현확만이 예외였다. 그는 대통령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속으로 생각했다.

‘수틀리면 오늘이라도 장관 안 하면 그만이지.’ 그런 배짱이었다. 신현확이 담배를 꺼내면 박정희 대통령은 당연하다는 듯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말년에 대통령이 담배를 끊었다. 그 뒤에도 신현확이 담배를 피우면 박정희 대통령은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주며 넌지시 물었다.

“나도 한 대 피우면 어떨까?”
“끊었다면서 뭘 또 피웁니까?”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은 친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배도 비슷하고 동향인데다 서로 대화하는 코드도 맞았던 것 같다.

2006년 늦가을, 강태기 시인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30년 전, 한 장관이 밤을 새워 연구하고 대통령을 설득했기에,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였기에…강태기 시인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감사하다고 말했던 그 제도가, 얼마나 치열한 논쟁과 헌신 끝에 만들어진 것인지를.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도를 만든 사람들이 바랐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가난한 시인이 임대아파트 작은 방에서 편히 누워 치료받다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세상은 왔다.

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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