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8월, 417호 법정. “이 새끼들이 우리 아버지를 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라고 해.” 신철식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뭐라고?” “민족문제연구소 답변서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나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A4 용지 20장이 넘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신현확은 우리가 친일파로 인식하고 있는 이완용보다 국제사회에는 더욱 극심한 피해를 끼친 것입니다.』 “이런 답변서가 왔다고? 이의신청은 언제 한 건데?”
“한 달 전에… 기각당했어.”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신철식.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 행정고시 출신 엘리트. 온유한 성품의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봐. 천천히.” 신철식은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말을 시작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든대. 사천칠백 명 명단에 아버지 이름을 넣을 거래.”
“이유가 뭔데?”
“일제 말기에 군수성 군수관으로 근무했다는 거지.”
“그게 사실이야?”
“아니.”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작은 눈이 반짝였다.
“아버지는 군수관으로 발령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어. 그대로 도망쳤어. 해방될 때까지 왜관에 숨어 지냈고.”
“증거는?”
“있어.”
그가 서류 뭉치에서 누렇게 바랜 잡지를 꺼냈다. <월간조선> 1988년 11월호. “아버지가 직접 인터뷰한 거야. 여기 봐.” 나는 기사를 읽었다.
『당시 나는 일본 동북구 센다이에서 군수관으로 근무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가만히 전황을 보니 일본은 곧 망할 게 틀림없었어요. 마침 한국으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겨 현해탄을 건넜지요. 그 길로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친척 증언도 있어.” 신철식이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대구 거주 이모 씨의 진술서.
『1945년 여름, 신현확이 고향인 왜관에 숨어 지내던 것을 목격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수배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나는 서류들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뭐라고 하는데?”
“그걸…”
신철식이 다시 답변서를 펼쳤다. 그의 손가락이 어느 문단을 가리켰다.
『신현확은 해방 전 군수성을 이탈하여 일제의 수배를 받았다고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신현확이 군수성을 이탈하여 수배를 받았다면 군수관시보에서 군수관으로 승진할 수 없다. 그것은 명백한 허위 주장이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논리적이었다. 수배 중인 사람이 승진할 수는 없다.
“승진이라는 말은 어떻게 된 거야?”
“정확히는 모르겠어.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이제 확인할 방법도 없고.”
침묵이 흘렀다. “우리 아버지를 잘 알잖아?” 신철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도 자주 왔고, 전두환·노태우의 군사반란 재판 때 아버지가 증언하는 것도 네가 봤잖아?”
나는 알고 있었다. 신현확 총리. 정말 대단한 노인이었다. 그걸 내가 확인한 순간이 있었다. 1996년 8월의 어느 날. 서울지방법원 417호 대법정. 전두환·노태우의 군사반란죄에 관한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그 법정에 있었다. 역사적 재판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루 8시간씩, 30일을 꼬박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그날 오전 심리가 끝나고, 오후 두 시경 다시 재판을 시작할 시간 무렵이었다. 법정 문 앞쪽으로 신철식이 아버지를 옆에서 부축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칠십대 중반인 신현확 전 총리는 걸음이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았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오늘 재판에 아버지가 증인으로 나오셔.” 신철식이 말했다. 전두환의 군사반란죄 재판에서 당시 총리였던 신현확의 증언은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었다. 그 부자는 방청석에 앉아 오후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법정으로 판사들이 나오고, 파란 죄수복을 입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피고인석으로 나와 섰다. 잠시 후, 아들의 부축을 받고 국무총리였던 신현확이 증언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두 사람이 신현확을 보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다.
잠시 후 증인신문이 시작됐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7시경, 최규하 대통령과 함께 계셨죠? 그날의 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검사가 물었다.
“그날 저는 개각을 협의하기 위해 대통령을 만나러 갔어요. 최규하 대통령이 나를 보자마자 말씀하셨어요. ‘조금 전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들어와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해서 조사해야 하겠으니 재가해 달라는 거요. 그래서 먼저 국방장관을 찾아오라고 했어요’라고. 국무총리인 저의 의견을 물으시는 거죠.”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잘하셨다고 답했죠. 그런 일은 국방장관을 통해 절차를 밟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렇게 하고 최 대통령과 40분 정도 얘기하고 있는데 비서관이 다급하게 뛰어들어와 시내에서 총성이 많이 울린다고 했어요. 한참 후에 비서관이 다시 들어와서 정승화 총장이 연행됐다는 보고를 했어요. 최규하 대통령이 ‘무슨 일을 그따위로 처리하느냐’며 앞에 전두환 사령관이 있는 것같이 화를 냈죠.”
“그게 전두환의 쿠데타인 걸 알았습니까?”
검사가 다그쳤다.
“최규하 대통령이나 총리인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다만 최규하 대통령이 다급하게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았죠. 그런데 국방장관이 연합사 상황실에 피해 있으면서 대통령이 오라는 지시를 두 번 받고도 응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날 군 병력의 이동에 대해서 대통령이나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죠.”
“그다음 상황은 어땠습니까?” “밤 9시 30분경, 황영시·유학성 등 여섯 명의 장군들이 대통령에게 왔어요. 그러면서 정승화 총장 연행을 재가해 달라고 했어요.” “장성들이 협박이나 강요, 불경스러운 언행을 했습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대통령이 뭐라고 했습니까?”
“국방장관을 찾아오지 않으면 못 하겠다고 했어요. 장군들이 돌아간 후에 대통령이 저를 보고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 절차를 무시하고…’라면서 역정을 냈죠.”
“그날 밤 대통령의 재가 없는 참모총장 연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를 바라보는 전두환의 표정이 머쓱했다.
“그날 밤 숨어 있는 국방장관을 직접 찾아 대통령에게 데리고 가셨다는데, 그 경위를 말씀해 주시죠.”
“그날 새벽 2시 30분경이었어요. 대통령하고 같이 있는데 국방장관하고 제가 통화가 됐어요. 내가 빨리 대통령실로 오라고 했더니 총격전이 벌어져서 못 오겠다는 거예요. 대통령이 제 전화기를 뺏어들고 국방장관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했죠. 그래도 못 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가 장관을 데리러 직접 국방부로 갔죠. 총격전이 벌어져 깨진 유리가 바닥에 질펀하고 아수라장이었죠. 장관이 억류되어 있는 건 아니었어요. 장관 보고 내 차를 따라오라고 하고 같이 출발했죠. 국방장관이 대통령에게 와서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재가를 하셔야겠다고 했어요.”
그날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는 권력을 잡았다. “그 후 전두환을 언제 보셨나요?”
“1980년 3월경, 전두환 사령관이 총리인 나를 찾아와서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와 관련해서 최규하 대통령을 조사했다고 하길래,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임명권자인 대통령을 조사하느냐고 화를 냈었죠. 그 무렵 전두환 사령관이 총리실을 찾아와서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의견을 묻길래, 중앙정보부는 문민 출신 인사를 임명해서 정보기관을 양분화하고 균형을 이루는 게 좋겠다고 반대 의사를 표명했어요.”
그가 말하는 옆에서 전두환이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긍정하는 표정이었다.
“그 후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는데, 당시의 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1980년 5월 17일, 주영복 국방장관이 총리인 저를 찾아와 대통령께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건의하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렇게 되면 계엄사령관이 대통령과 직결되고, 총리와 내각의 행정권은 배제되는 걸 의미했죠. 내가 총리로 있는 내각이 불신임을 당하는 것이죠. 최 대통령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허락했어요. 그날 저녁 임시 국무회의가 열리고 8분 만에 그 안건이 통과됐어요. 이튿날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하고 총리직을 그만뒀습니다.”
“증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던 1979년 10월 26일에도 장관으로 임시 국무회의에 참여하셨죠? 그날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육군본부 벙커로 장관들을 불렀습니다. 국가 비상사태가 벌어졌으니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상황이 어땠습니까? 김재규가 대통령을 죽인 권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공포 분위기 아니었나요?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가 김재규에게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면 법적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 사유가 뭐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대통령의 유고라고 했어요. 대통령의 유고면 장관인 제가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못해 저를 내보냈습니다. 제가 육군병원에 가서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 김재규인 걸 알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김재규가 체포됐습니다.”
검사도, 변호사도, 방청객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들었다. 신현확의 증언이 대충 끝났다. 검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노령에 오랫동안 증언을 하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증인께서는 당시 총리로서, 또 우리 사회의 원로로서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마지막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잠시 침묵했다. 깊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이 법정은 16년 전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대한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될 겁니다. 이 법정에서 심판을 끝내면 사건은 법적인 관점에서 종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앞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미치는 영향과 파장이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과정과 결론을 되돌아볼 때 모든 국민이 긍지를 가지고 화합할 수 있는 그런 매듭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두 시간이 넘게 증언을 한 신현확 전 총리는 어지러운 듯 약간 휘청거리며 증언석을 내려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아들 신철식이 아버지를 부축하고 총총히 법정을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재판의 방청기를 썼다. 30일 동안의 재판 기록. 일본의 시사잡지 <문예춘추>에서 그것을 책으로 내자고 제의했다. 내가 원고를 보냈다. 얼마 후 문예춘추의 편집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신현확이라는 사람, 당신이 쓴 대로 정말 그런 사람입니까?”
“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그를 너무 높게 평가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는 제가 본 것을 썼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거야.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도와줘.”
“당연하지.”
나의 내면에서 투지가 솟아올랐다. 동시에 문예춘추 편집장의 질문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를 너무 높게 평가한 것 아닙니까?’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