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문화칼럼

김훈, <칼의 노래>에서 <남한산성>까지…한국 남자의 마음을 쓴다

화진포 앞바다

요즘 소설이 재미없는 이유

동해 최북단 화진포에 다녀왔다. 1986년 겨울 군복무 중 처음 본 파도였다. 40년 전 일이다. 청춘은 늙어가고, 그 젊음이 너무 걱정 말라며 민간인통제선 너머로 달아난다. 10년 전 포스팅했던 흔적이라며 핸드폰 신호가 뜬다. 찾아가 읽는다. 한 늙은 소설가의 문체 이야기다. 그는 한때 한글 문체의 빛나는 별이었다. 아직도 유효하다.

인간의 삶은 길고 짧음을 떠나 결국 한 문장으로 남는다. 어떤 문장으로 기억될까. 남는 자들은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자식조차도. 주어와 서술어, 이 한 문장이 남을지 아닐지다. 7번 국도 간성에서 거진항까지 내리치는 파도는 언제나 내 마음속의 코발트블루다.

2001년 출간된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100만 부를 돌파했고, 2007년의 <남한산성>은 50만 부를 넘겼다. <바다의 기별> <자전거 여행> <현의 노래> <밥벌이의 지겨움> 등도 꾸준히 읽힌다.

출판계에 따르면 김훈의 책을 찾는 독자는 주로 50~60대 중년 남성이다. 그의 문장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만큼 강렬하다. 왜 한국 남성들이 김훈에게 끌릴까. 그의 문학은 남자들의 내면을 건드린다. 흔들리는 마음과 불안한 자존을 역사라는 무대에 투영한다.

“내 끝나지 않는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그 건설은 소멸되기 위한 건설이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칼의 노래> 중에서

1. 치욕과 생존
남자는 늘 선택을 강요받는다. 어느 진영이냐, 어디 소속이냐, 누구 편이냐. 선택 후에는 책임을 지고 밥값을 해야 한다. 경쟁은 치열하고, 생존은 치욕과 맞닿아 있다. 가족의 밥그릇을 지키는 일은 지겹고 두렵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에서 김훈은 명분이나 이념에 집착하지 않는다. ‘무력한 살아있음의 비애’를 인정하고 끼니를 때워야 하는 생물학적 진실 앞에서 인간의 허무를 직시한다. 가까스로 살아 있음으로써 아름다운 생존. 한 평론가는 이를 ‘불가피의 미학’이라 했다.

김훈은 전쟁의 공간을 탐닉한다. 악과 폭력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터전, 세상의 본질이 드러나는 무대다. 전쟁에 갇힌 이순신, 우륵, 서날쇠의 삶은 오늘의 우리와 겹친다. 무력한 리더십에 대한 한탄, 생의 절박함은 지금의 자화상이다. 작가는 치욕을 건드리며 자존을 두드린다. 생의 자존과 치욕은 하나의 몸처럼 맞닿는다.

IMF 이후 한국 남자들은 깨달았다. 국가는 나를 지켜주지 않고, 조직도 나를 감싸주지 않는다.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다. 시대는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개별자의 몸짓으로 이루어진다. 월급쟁이는 무산자다. 급여로 삶을 유지하고, 여유를 포기한 대신 조직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김훈은 그런 한국 남자의 공허를 읽었다. 치욕과 자존이 버무려진 비애를 역사라는 무대 위에 옮겼다. 그래서 한국 남자는 그의 글로 괴로워하면서 위로받는다.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남한산성> 중에서

2. 문체주의자
‘스타일’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김훈의 스타일은 독보적이다. 그는 겉멋이 아닌 내용 그 자체로서 문장을 쓴다. 서사는 장황하지 않고 압축적이다. 진지하고 절제되어 있어 읽기 쉽지 않다. 주인공은 중얼거리지 않고,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의 세계에는 신파도, 허세도 없다.

형용사와 부사를 배제하고 주어와 동사로만 승부하는 문체주의자. 김훈의 문장은 흉중의 비장미를 품고 흐른다. 인간의 구체성이 동사 속에 실려 여울진다. 그의 문장을 따라 걷다 보면 세상의 길 위에서 서성이는 수많은 ‘나’를 만난다.

김훈의 문체는 사실주의적 정확성과 칼날 같은 취재에서 비롯된다. 팩트가 문체의 뼈대를 이루고, 리듬이 남성적 호흡을 타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문장은 파도처럼 다가왔다가 노을처럼 퍼지고, 서로의 뜻을 반사하며 긴 의미의 파장을 만든다. 예민한 감각과 절제된 묘사는 관능적인 긴장을 낳는다.

“글을 쓸 때 문장 안에 음악이 있어야 합니다… <칼의 노래>를 쓸 때는 진양조를 버리고 휘모리로 갔습니다.”— <문학동네>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3. 약육강식 그 너머
기자 생활 30년을 마친 김훈은 기사 문체를 소설 문체로 바꾸었다. 자전거를 타고 술을 즐기며, 연필과 지우개로 원고지에 글을 쓴다. 인터넷은 하지 않지만 독자를 대접할 줄 안다. 그의 소설은 200만 부 이상 팔렸고,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

그의 역사소설은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대신 인간 보편의 조건, ‘약육강식’을 응시한다. 세상은 여전히 악이 반복되는 공간이다. 김훈은 악의 총체성을 쓰겠다고 말한다. 악을 직시할 때 비악(非惡)과 반악(反惡)이 드러난다고 본다. 약육강식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굴욕을 견뎌야 한다. 김훈은 그 치욕을 담담히 그린다. 그의 소설은 비감의 풍경 속에서 인간이 끝내 품고 가야 할 생의 의지를 이야기한다.

김용길

'편집의 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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