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까지만 해도 은행이나 가정에서는 주판으로 계산하는 일이 많았다. 매년 전국 주판 경시대회가 열리면 복잡한 수를 놀라운 속도로 계산해내는 ‘주판 천재’들이 나오곤 했다. 지금은 어디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을 만큼 주판은 자취를 감추었다.
인간이 주판을 발명해 사용한 역사는 길다. 주판은 기원전 190년 무렵 중국에서 발명되어 오랫동안 지배적인 계산 도구 역할을 했다. 중국인들이 오래전부터 써 오던 산(算)가지 계산법을 발전시켜, 당시로서는 ‘수퍼컴퓨터’라 부를 만한 놀라운 주판을 만들어낸 것이다. ‘산가지’는 고대 중국인들이 사용한 수 체계로, 특히 상인들 사이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산가지 숫자는 선을 바탕으로 한 기호를 사용해 진흙이나 모래 위에 쉽게 새길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은 ‘산목(算木)’이라 부르는 막대를 사용했다. 상인들은 대나무로 만든 산가지 묶음을 가지고 다니며 그때그때 필요한 계산을 했다.
산가지 수 체계에서 1부터 9까지 나타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산가지를 세로로 하나부터 다섯까지 세워 1~5를 표시하고, 6에서 9까지는 가로 산가지 하나 아래에 세로 산가지를 하나씩 추가하는 식이다. 또 하나는 가로로 하나부터 다섯까지 놓아 1~5를 표시하고, 6에서 9까지는 세로 산가지 하나 아래에 가로 산가지를 하나씩 늘리는 방법이다. 이는 주판에서 위에 있는 알 하나가 5를, 아래 있는 알 네 개가 1씩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또 빚이나 지출을 표시할 때는 음수를 나타내기 위해 빨간색 산가지를 사용하여,
양수인 검은 산가지와 구분했다. 산가지 계산법은 주판 계산법을 떠올리면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산가지 수 체계의 놀라운 점은 ‘자릿수 0’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자릿수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숫자 0을 만들어 자릿수를 표시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인 6세기경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세로 산가지와 가로 산가지를 번갈아 사용하는데, 1, 100, 10000의 자리는 세로 산가지로, 10, 1000, 100000의 자리는 가로 산가지를 사용하는 식이다. 세로 산가지나 가로 산가지가 연달아 있을 때는 중간에 한 자리가 비어 있다는 뜻이므로 자릿수 0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4,508을 𝍣 𝍭 𝍰로 표시하는데, 5와 8이 연달아 세로 산가지이므로 중간에 자릿수 0이 있다고 아는 식이다. 다만 0이 연달아 있을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다.

중국의 수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책이 있다. 바로 <구장산술>(九章算術)이다. 이 책은 농경지, 곡물, 노동력을 관리해야 하는 관리들의 수학 교과서였다. 총 아홉 개의 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미지의 양을 구하는 대수학(代數學)과 기하학(幾何學)도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 1000년경에 저술되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지만, 늦어도 기원전 3세기 진시황 통치 이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구장산술>의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3세기 수학자 유휘(劉徽)가 주석을 달아 편찬한 <구장산술주>가 남아 있다.
중국에서 이처럼 수학이 발달한 것은 모든 학문이 발전한 춘추전국시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시기 발행된 <주역>(周易)은 동양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주역은 우주 만물의 이치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방법, 미래를 예측하고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찾는 방법을 안내한다. 이 책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동양에서 주역이 문화적으로, 수학적으로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주역은 톱풀(쑥부쟁이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가지를 여섯 번 던져 그것이 땅에 떨어진 모습인 효(爻)를 보고 64괘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해 점괘를 얻는다.
6개의 효는 각각 음효(–)와 양효(ㅡ) 두 가지가 있어 괘의 총 개수는 2의 6제곱, 즉 64개가 된다. 1과 0을 사용한 2진법으로 모든 수를 표현하려 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수학자 라이프니츠(1646~1716)는 주역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의 수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학문이 꽃피던 시기에 수학 또한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오랑캐’라 멸시했던 청나라는 일찍부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실사구시 정책을 폈다. 그에 비하면 낡은 성리학의 틀에 갇혀 공리공론에 머물렀던 조선의 학자들이 아쉬울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