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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임동원 자서전 <다시 평화>…시대가 빚은 ‘전략가의 변주’

임동원 저 <다시, 평화>

반공 군인에서 평화전략가까지 – 변절인가, 진화인가

우리는 지조나 절개를 지키지 않고 마음을 바꾼 사람을 변절자라고 한다. 조지훈 선생은 지조를 일러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고 눈물겨운 저항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라고 하였다. 반공 이념과 공산주의의 이념과 사상을 비판하였던 군인이 시대상황에 따라 이념을 바꾼 것을 우리는 변절이라고 한다. 임동원 씨는 여러 직책을 거쳐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부르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그는 『피스메이커』라는 회고록을 보완하여 『다시, 평화』라는 자서전을 2022년 발간하였다.

전쟁 세대의 아들에서 장교가 되기까지
임동원은 1933년 평안북도 위원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 월남했다. 미군부대 종업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1957년 육군사관학교(13기)를 졸업하며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고, 인제대·원광대에서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출발은 가난과 전쟁의 상처 속에서 국가재건과 개인적 도약을 동시에 추구한 세대의 전형이었다.

1960~70년대 – 반공 이데올로그와 자주국방 설계자
동서 냉전이 절정이던 1960년대 그는 육사 교수로 공산주의 비판과 대공전략론을 강의하며 젊은 장교들에게 이념전의 중요성을 주입했다. 1970년대에는 합참·육군본부 전략기획부서에서 활동하며 율곡계획(자주국방 전력증강 프로그램) 수립에 깊이 관여, 한국군의 무기 현대화와 방위산업 기반 구축에 실질적 기여를 했다. 이 시기 그는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을 집필해 반공 군사사상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 외에도 「ROTC 제도 개선책」을 연구했고, 이스라엘 6일 전쟁을 관찰하고 집필한 「이스라엘 군사제도 시찰결과보고서」도 작성하였다.

1980년대 – 외교관과 안보정책가로의 전환
그는 28사단 81연대장을 마치고 육군 80위원회에서 육군 장기전략을 구상하였으며, 28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외교 무대로 진출했다. 나이지리아 대사 4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 3년, 외교안보연구원장을 역임하면서 양재동 외교안보연구원을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군생활 이후의 외교관 생활로 군사적 시각에 더해 외교적 감각을 체득했다. 이는 훗날 남북 협상과 북핵 문제 대응에서 군사·외교를 아우르는 전략적 시야를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되었다.

1990년대 – 남북합의와 비핵화 선언의 설계자
냉전 종식 후 그는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통일원 차관으로 활동하며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을 주도했다. 1995년 초에는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으로 있으면서 김대중 당시 이사장의 ‘3단계 통일론’ 완성에 기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와 같이 일하기 위해 실제 삼고초려를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대결 일변도의 군사전략가에서 대화와 평화를 탐색하는 현실주의적 전략가로 변화를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 시기 – 햇볕정책의 총설계자
김대중 정부(1998~2003)에서 그는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통일부 장관·국가정보원장·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를 잇달아 역임하며 대북 화해·협력 정책의 사령탑이 되었다. 2000년 6월에는 김대중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도출했다. 이후에도 2002년과 2003년 대통령 특사로 다시 평양을 찾아 남북관계의 연속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는 미국·일본과의 외교 공조를 통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했으나, 동시에 대북 비밀송금 문제와 북핵 위기 재부상으로 거센 비판도 받았고 노무현 정권 시 대북 송금을 위한 외화 환전 관련으로 감옥에 갔다.

퇴임 후 – 평화 담론과 학문적 성찰
45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친 뒤 그는 세종재단 이사장,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김대중평화센터 고문, 한반도평화포럼 명예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 『피스메이커』를 통해 그는 자신의 대북정책을 “전쟁 억지와 평화 구축을 위한 현실적 선택”으로 해석했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훈장 삼일장·천수장(안보 분야), 황조근정훈장·청조근정훈장(통일 분야)을 비롯해 한겨레통일문화상, 민족화해상, 심산상, 임창순상, 백범통일상 등을 수상했다.

상반된 평가 – 변절자 vs. 현실주의자
보수 진영에서는 “반공 군인에서 북한 유화로 선회한 변절자”로 본다. 특히 비밀송금 논란과 북핵 불능화 실패는 ‘안보 해이’의 상징으로 비판받는다. 진보 진영에서는 “전쟁세대가 선택한 평화의 길잡이”로 평가한다. 군 출신 엘리트가 대결을 넘어 평화를 설계한 실용적 전략가라는 시각이다. 변절 문제만 제외하면 그는 국방기획관리 체계상의 장기 군사력 건설을 위한 군사전략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이다. 중도 진영과 학계에서는 냉전기의 강경 안보관에서 출발해 군사 억제와 평화공존의 접점을 찾은 현실주의적 진화주의자로 본다. 다만 그의 정책이 북핵 고도화와 북한 체제 강화라는 역효과를 막지 못한 한계는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우리 정부 단독의 문제라기보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온을 오가며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데 따른 영향으로 보고 있다.

종합 평가 – 시대가 빚은 ‘전략가의 변주’
임동원의 궤적은 개인적 변절이라기보다 한반도 안보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적응과 전략적 모색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그 → 자주국방 설계자 → 외교관 → 통일정책가로 이어진 그의 여정은 한국 현대사의 변화를 압축한다. 그가 설계한 햇볕정책은 북핵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북한의 협상 전술에 이용당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군사와 외교를 결합해 전쟁을 막고 대화를 제도화하려 한 첫 실험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도 부정할 수 없다.

임동원은 냉전기의 반공 군인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설계한 전략가로 변모한 복합적 인물이다. 그의 성공과 실패를 함께 평가하는 일은 오늘날 한국의 안보와 통일정책을 재설계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대한민국에서 김일성 2번, 김정일 4번, 그리고 김정은 2번 만난 사람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으로 핵개발 자금이 흘러 들어가 북한 동포를 질곡에 더 오랫동안 빠뜨린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인물의 변화를 단순한 변절로만 읽지 말고 시대적 맥락과 전략적 선택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전 1기갑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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