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대륙과 러시아의 한국독립운동가를 탐사하다 보면 난해한 문제 중의 하나가 그들의 이념성향에 관련된 문제이다. 친일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독립운동 전선에서 민족주의자(자유민주주의자) 인가,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였는가의 구별이다.
중국지역은 만주와 상해지역이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병존이 가능했다. 그러나 러시아 지역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 후에는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사회주의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민족의 독립, 항일운동이라는 과제 앞에서 이념이 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라는 인식도 있지만, 당시에도 다툼은 상당하여 상호 폭력과 암투, 암살 등 격렬한 투쟁을 동반했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을 치르고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체제 경쟁을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대한민국 체제의 정당성과 국가보안법 등 실정법적인 한계가 있어 쉽게 넘을 수 없는 문제였다.
1991년 공산주의 소비에트공화국(소련)이 붕괴하고 대한민국이 러시아 중국과도 국교 수립이 이루어지면서 사회주의 성향 독립운동가의 연구에 해빙기를 맞은 것이다. 시차를 두고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진보적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들을 발굴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그동안 암흑에서 묻혀있다가 양지로 올라왔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런 대표적 인물이 성재 이동휘(1873-1935) 선생의 일생이다.
블라디보스토크(약어 블라디크)뿐만 아니라 만주, 러시아 곳곳의 독립운동, 상해임시정부, 사회주의혁명운동 전반에 걸쳐 이동휘가 끼친 영향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보수적인 조선의 군인에서 출발해 의병으로, 독립운동가, 기독교 사회개혁가로,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로 일생을 마친 이동휘였다.
그의 흔적이 깊게 묻어있는 곳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이었다. 2020년에 이르러 경기문화재단과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지원으로 이동휘의 흉상이 새겨진 석조 기념물이 파크롭스키 성당 인근에 세워졌다. 이제 그 파란의 일생을 추적해 본다.

이동휘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빈농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방관아의 말단으로 출발한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군수의 학정에 강력히 반발하며 서울 탈출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함경도 출신들이 연해주 이민을 선택한 것과 대비되는 일면이다.
함경도 출신 이용익 탁지부 대신의 추천으로 1896년 근대조선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참위(소위)로 임관하며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부패한 조선 말기 청렴한 군 간부로 참령(소령)으로 진급한 후 강화도 진위대장을 역임하였다. 1905년 군문에서 물러난 후 기독교에 입문하여 포교활동과 학교 설립으로 민족계몽운동에 매진한다.
1911년에는 105인 사건 관련자로 유배형에 처해졌고, 1913년 2월 조선을 떠나 만주 간도 지역으로 탈출한다. 만주 전역을 순행하며 기독교 포교와 독립투쟁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는 군의 장교 출신이었기에 청년장교를 키우는 것이 독립투쟁의 요체라고 믿어 비밀리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창설한다.
1913년 10월에는 훈춘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잠입하여 기독교 포교와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한다.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의 초석을 까는 일과 조선민족의 화합이 그의 과제였고, 함경도, 평안도, 기호파로 분열된 교민사회에서 통합을 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좌우 진영 통합의 중재자로의 자질을 보인 것이다. 교통수단이 미비하고 여행과 이동이 쉽지 않던 그 시절 그 넓은 대륙을 오가는 그의 행보는 가히 순교자와 같은 희생의 삶이었음을 알게된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극동 정세를 급변시켰다. 적대관계였던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의 여건도 급변하여 연해주에서 궁지에 몰렸다. 제정 러시아는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연해주 지역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동휘와 20여 명의 망명 독립운동가 중 일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일부는 러시아-만주 국경지대로 피신해 다녀야 했다. 이동휘는 북만주 국경지대로 피신했다.
1차대전이 계속 중인 1917년 2월, 제정러시아 내부에서 발생한 러시아혁명은 또다시 극동 정세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제정러시아가 무너지면서 이동휘는 1917년 봄 블라디크 신한촌으로 복귀했으나, 밀고자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아무르주 알렉세옙스크(현재명 스바보드니, 자유시) 감옥에 수감된다.
러시아의 형사사법 시스템은 영토대국에 걸맞게 광대한 것인가? 아니면 처벌의 강도가 강한 것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알렉세예프까지는 약 1600Km 거리로 기차로만 꼬박 28시간이 소요되는 원거리 이동이다. 유배와 징역이 복합된 징벌이다. 당사자인 이동휘와 그 가족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1917년 10월 2차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후 고려인 볼셰비키들의 성원으로 혐의가 벗겨져 석방되고 하바롭스크로 돌아온다. 이렇듯 도피와 체포, 은신과 감옥은 그를 포함한 러시아령 독립운동가들의 일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