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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안종필 평전’ 출간…펜과 온몸으로 쓴 기자

김성후 저 <동아투위안종필평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으나 ‘서울의 봄’은 쉽게 올 것 같지 않은 채 한겨울의 삭풍이 계속되던 1980년 2월 초 한 일요일.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막내인 정연주(鄭淵珠) 해직기자(79, 후에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 제15~17대 KBS 사장, 건양대 총장)는 을지로 2가 향린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원자력병원으로 안종필(安鍾珌, 당시 43) 선배를 병문안했다.

안종필은 그 전전 해인 1978년, 동료들과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사건을 모아 <동아투위소식>으로 배포했는데, 여기에는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 일지’가 함께 실려 있었다. 경찰은 1978년 10월 이를 문제 삼아 ‘동아투위’ 위원들 체포에 나섰고, 안종필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11월 10일 구속됐다.

이듬해인 1979년 5월 9일 1심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는 순간, 안종필과 홍종민·장윤환·안성열·김종철·정연주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채로 소리 높여 노래 불렀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곧 돌아가리라 / 자유 누리는 세계로…” 아프리카 흑인들이 자유를 갈망하며 부른 찬송가였다.

맨 오른쪽이 안종필

그해 7월 25일 있었던 항소심은 단 1회로 끝나버렸다. 당국에서는 골치 아픈 이 사건을 빨리 털어버리려는 의도가 뚜렷했다. 모두 7명의 ‘동아투위’ 동지들이 최후진술을 했다. 안종필의 진술은 쉽고 짧고 뚜렷했다.

“우리는 비록 펜과 마이크를 빼앗기고 쫓겨나 있지만 기자로서의 긍지와 정신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매달 <동아투위소식>이라는 간행물을 만든다. 우리는 특히 현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은 사건들을 기록했는데, 그 때문에 지금 이렇게 법정에 서 있다. 자유언론을 압살하는 모든 법과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다는 것이 구속됐을 때나 지금이나 내 소신으로 변함이 없다. 언론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공기라든지 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경찰서에서 ‘악법도 법이다, 그렇게 집행할 수밖에 없다’ 이런 얘기를 하던데, 악법이 법이면 그것이 집행되기 전에 철폐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 법조인의 기본정신 아닌가. 그런 신념으로 재판을 해주기 바란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실은 대단한 달변이었다. 이후 광복절 특사로 많은 동지들이 풀려나가고, 감방엔 그와 정연주 등 5명만 남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10월 말이 왔고, 10월 27일 아침 안종필은 간수로부터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들었다. 그러나 곧 석방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시해 이후 한 달 9일이 지난 12월 4일에야 석방이 됐다.

그러나 안종필은 석방 얼마 후인 17일 병원 검진에서 간암을 발견하게 됐다. 그것도 3개월 시한부였다. 가족과 동지들은 한동안 이를 숨겼으나 마지막 삶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1980년 1월 말쯤 알려줬다. 부인 이광자(李光子, 84) 여사는 “간암 말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를 한번 쳐다보고 고개를 떨구는 남편의 쓸쓸해하는 모습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회고했다.

안종필은 평소 두 개의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 또 하나는 자유언론에 대한 신앙이었다. 정연주가 병문안을 갔을 때, 마침 안종필은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목청껏 부르고 있었다. 정연주가 그날 예배 때 목사님(이해동 목사)이 했던 말씀을 전하며 위로하자, 안종필은 갑자기 정연주의 손을 꼭 잡으며 “야 연주야, 나 1년만 더 살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협회보 기사

그러나 안종필은 2월의 끝날인 29일 타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종필 위원장은 타계 나흘 전인 2월 25일자 한국기자협회보 인터뷰 기사에서 ‘동아투위’ 문제 해결방안을 논하고 자신의 복직 의지를 밝히는 등 초인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45년 지난 7월 17일 오전, 뉴스타파 건물 리영희홀에서 열린 <안종필 평전> 출판기념회에서는 여러 인사들이 그와의 인연을 회고하고 추억했다. 안 위원장의 후배인 이부영 현 동아투위 위원장은 “고인은 생긴 모습 그대로 거의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고, 필요할 때만 얘기를 했다”며 “그러면서도 조용하나 확실한 리더십으로 동아투위를 잘 이끌어 주었다”고 회고했다.

45년 전인 1980년 3월 장례식 때도 추모사에서 “고인은 붓으로 기사를 쓴 게 아니라 몸과 피눈물로 쓴 분이었다”고 했던 함세웅 신부는 “장례 예배를 집전했던 이해동 목사님은 항상 ‘안종필 위원장이 내 교회 신도였다’고 자랑하셨다”며 “평전을 보다가 안 위원장 자녀가 ‘우리 아버지 동아일보 기자야’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그때는 이미 쫓겨나 해직된 후였다”라는 대목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밝혔다. 함세웅 신부는 “안 위원장은 가톨릭에서 박해받고 희생한 사제를 순교자라 부르듯이, 언론자유를 위해 온몸을 던진 순교자”라고 확언했다.

‘조선투위’(1975년 32명 강제 해직) 위원장을 오래 했던 신홍범님은 “안 위원장은 순교자이고, 가장 거룩한 사람이며, 대의를 위해 죽음으로써 영원히 산 사람”이라고 말했다. 서평을 맡은 고인의 동아투위 후배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해직 후 책상 하나 놓고 출판사를 차려 지금까지 3만 5천여 권의 책을 냈다”며 “출판사 사장은 책을 보면 어떻게 잘 팔리게 할까부터 생각하는데, 책의 작은 제목 ‘자유언론에 순교하다’가 너무 좋아 느낌이 괜찮다”고 말했다. 조성호 자유언론재단 이사장도 “안 선배님과 같은 분을 너무 일찍 잃은 것은 우리 언론계의 큰 슬픔이자 손실”이라며 “후배들이 큰 선배의 뜻을 잘 이어나가자”고 말했다.

안종필 위원장은 1937년 경남 하동 출신으로, 경남고와 외국어대 영어과를 마치고 1963년 부산일보 기자로 언론생활을 시작해 조선일보를 거쳐 1966년 11월부터 동아일보에서 일하다 불과 8년여 만에 강제 해직됐다. 그리고 또 불과 5년 만에 타계했다.

동아투위는 안종필 2대 위원장의 언론자유에 대한 신념과 실천 의지를 기리기 위해 지난 1989년부터 ‘안종필 자유언론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주요 수상자를 보면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보도지침 폭로), 권영길 언론노조 위원장(언론노조 운동 주도), 김중배 동아일보 편집국장(편집권 독립 주장), 최문순 전 MBC 노조위원장,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탐사저널리즘 뉴스타파 등 쟁쟁하다.

안종필 선배는 “민중을 위해 신문은 최대한 쉽게 만들어야 한다”며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을 주장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약사인 부인 이광자 여사가 생활을 책임졌고, 1남 1녀를 잘 길러냈다. 평전은 기자협회보 편집국장을 거쳐 지금은 선임기자인 김성후 작가가 썼다. 당초 동아투위 만 50주년인 올해 3월 17일 간행을 목표로 했으나 늦어졌다. 행사가 끝난 뒤 부인 이광자 여사께 “안 선배님의 어디가 특별히 좋으셨느냐”고 물었더니 “다 좋았다. 너무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안종필 만날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사진 앞줄 가운데 안종필 기자 부인 이광자 여사, 오른쪽으로 이부영 동아투위위원장, 신홍범 조선일보 해직기자 등이, 왼쪽에서 5번째 함세웅 신부.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대표, 김대중정치학교 대외협력본부장,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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