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정치사회칼럼

[광복 80돌] 해방은 왔지만 귀향은 없었다…시베리아 억류 조선인의 ‘한 맺힌 미해결 과제’

사할린에서 강제노역에 내몰린 조선인들


오는 8월 15일은 광복 80주년이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이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전해진 종전 소식은 37년 동안 나라를 잃고 살아온 한민족이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한 날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해방의 기쁨에 들떠 있던 그때, 일본군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종전은 곧 지옥 같은 고난의 시작 이었다.

만주, 북한, 사할린, 쿠릴열도 등지에서 일본군 64만여 명이 소련군에 체포돼 포로가 됐다. 일본군 지휘부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고 부대 명부를 소련군에 넘겼고, 조선인은 송환해야 한다는 상부 방침이 있었지만 소련 지휘관들은 이를 무시했다. 포로들은 45년 9월부터 다음해 여름까지 기차, 배, 심지어 도보로 소련 영토로 이송돼 약 2,000여 곳의 수용소에 수감됐다. 수용소의 80%는 시베리아 지역에 있었고, 수감자들은 1,000명 단위로 노동대대에 편성돼 소련의 전후 복구와 경제 재건을 위한 강제노동에 투입됐다. 약 3,000명의 조선인 포로들은 혹한과 굶주림,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일본군 포로 중 일본인은 48년 3월부터 귀환이 시작됐지만, 조선인은 상대할 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48년 10월부터 각 수용소의 조선인들은 귀환을 위해 하바롭스크 380수용소에 모였고, 3~4년의 억류 끝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1월 28일, 나홋카 항을 출발한 노보시비르스크호는 다음 날 흥남 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남한 출신 귀환자 500여 명은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모두 체포돼 취조를 받고 전재민 수용소로 이송돼 또다시 감시와 조사를 받아야 했다. 두 달 넘게 수용소 생활을 더 이어간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본문에서) 이 글의 필자이 고 문순남씨가 대표적인 피해자다. 그의 유일하게 남은 사진으로 휴전 후 54년1월~58년1월 1사단에서 복무 중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고 필자 문용식씨는 말했다. <사진= 문용식 제공>


억류의 배경
소련은 ‘5년간 상호 침략을 하지 않는다’는 소일중립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45년 8월 9일 새벽,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 170만 병력을 동원해 만주, 북한, 사할린, 쿠릴열도를 침공했다. 이는 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독일 항복 후 90일 이내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연이은 패배로 일본은 만주에 있던 관동군 정예 병력을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남방전용’을 시행했고, 이에 따라 부족한 병력은 식민지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해 보충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은 소련에 평화협상을 시도했고, 모스크바 특사 고노에 후미마로는 그가 작성한 ‘화평교섭요강’에 따라 소련에 ‘일본군 일부를 현지에 잔류시켜 노동력을 제공한다’고 제안하지만 소련 수뇌부는 이를 거부했다. 소련은 8월 16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사할린과 쿠릴열도 외에 홋카이도 북부 점령까지 제안한다. 트루먼이 거부하자 8월 22일 스탈린은 ‘홋카이도 상륙 포기’ 전문을 보내고, 다음 날 ‘건강한 일본군 포로 50만 명을 소련 영내로 이송하라’는 극비명령 9898호를 하달했다.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병사들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귀환과 정착
일본군 포로 중 일본인은 48년 3월부터 귀환이 시작됐지만, 조선인은 상대할 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48년 10월부터 각 수용소의 조선인들은 귀환을 위해 하바롭스크 380수용소에 모였고, 3~4년의 억류 끝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1월 28일, 나홋카 항을 출발한 노보시비르스크호는 다음 날 흥남 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남한 출신 귀환자 500여 명은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모두 체포돼 취조를 받고 전재민 수용소로 이송돼 또다시 감시와 조사를 받아야 했다. 두 달 넘게 수용소 생활을 더 이어간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환자들은 돌아온 뒤에도 고난이 끝나지 않았다. 귀환자 명단은 경찰에 넘어가 요시찰 인물로 관리됐고, 지역 간 이동에도 경찰 허가가 필요했다. 억류 사실은 가족에게조차 숨겨야 했고, 반공국가 체제 속에서 소련 억류 경험은 빨갱이라는 낙인을 불러왔다. 경찰과 우익단체의 감시와 폭력, 모욕은 계속됐고, 심지어 장례식까지 경찰이 찾아와 감시했다.

억류문제를 보는 한일 양국의 시각

한국 정부는 억류 피해자들의 보상 요구에 대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하지만 2005년 청구권협정 문서가 공개되자, ‘민관공동위원회’는 이 협정이 식민지배 배상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일본 정부와 군대가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억류자 모임 ‘삭풍회’는 정부에 진정을 내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미지급 군인 봉급, 노동임금 지급,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는 실질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자국 억류자에게는 특별법과 기금 등을 통해 보상했지만 한국인 피해자는 철저히 배제했다. ‘삭풍회’가 2003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2011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며 상고마저 기각했다.

피해자들의 요구
시베리아 억류문제는 한일 청구권협정 대상이 아니며, 양국 정부는 자국 헌법과 국제법을 위반했다. 종전 80년이 되도록 문제는 방치됐고 피해자들은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일본 정부는 자국 피해자에게는 특별법을 제정해 보상했지만 한국인 피해자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외면했다.

피해자들은 생전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 미지급 봉급과 미지불 노동임금 지급, 위로금과 정신적·육체적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이제라도 억류문제를 한일협정과 별개로 보고 일본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 일본 정부는 국적에 상관없이 자국 피해자에게 적용한 보상 기준을 한국인 피해자에게도 그대로 적용해, 당시 화폐가치에 맞는 보상을 해야 한다.

문용식씨의 선친 문순남씨가 옛소련 ‘전쟁포로 및 수용자 관리본부’에서 작성한 자필 서명 ‘文順南’이 보인다. 이 문서는 수용소 석방을 앞둔 1948년 10월 26일 작성된 것으로, 문순남은 해방 직후부터 만 3년 2개월 이상 소련으로 끌려가 포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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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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