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사회

6·25날 아침에 떠오른 할아버지와 산삼 다섯뿌리 사연

장뇌산삼(長腦山蔘), 장로(長蘆)라고도 불리는 산양산삼꽃. 경남 산청군 산청읍 범학마을 산양산삼 재배지에 진한 붉은색 꽃이 활짝 피어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7월 한달간 꽃이 피고 재배농민들은 종자를 확보하려고 씨 따기 작업을 벌인다고 한다. 

2025년 6월 25일 아침, 컴퓨터를 켜는 순간 한국전쟁 발발일이라는 사실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 순간 문득 생각난 이는 다름 아닌 할아버지였다. 필자가 태어나기 몇 해 전인 마흔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분이다.

해마다 음력 2월 초아흐레는 할아버지의 제삿날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날, 당시 60여 가구가 살던 마을에서 무려 아홉 집이 동시에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이다. 추운 겨울이 끝나갈 무렵, 이 날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종의 기다려지는 명절이기도 했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각 집마다 사랑방에 정성껏 차린 음식과 나물 비빔밥을 ‘단자’라 불러 이웃과 나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엔 그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진실은 뼈아팠다. 한국전쟁 말기, 고향은 빨치산의 주둔지였다. 그 무렵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끌려가 덕태산 자락, 지금은 산림청이 국가 치유의 숲으로 조성 중인 그곳에서 즉결처분됐다.

그 사연은 훗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를 합장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백운면 파출소 인근의 ‘작은댁’이라 불리던 집(과거 술집으로 알려짐)에서 자던 할아버지가 끌려갔고, 함께 끌려났던 한 사람이 무사히 풀려나면서 당시 상황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공로로 할머니는 뒤늦게 국가보훈처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훈장이 도착한 때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할아버지의 제삿날이 음력 2월 초여드레로 정해진 이유는, 바로 그날이 끌려가신 날이기 때문이다. 시신이 마을로 돌아온 것은 석 달이 지난 후였다.

가끔, 할아버지의 사진 속 모습을 떠올린다. 중절모를 쓰고 빙긋이 웃고 계시던 젊은 날의 모습. 어딘가 ‘탁류’의 작가 채만식 선생을 닮은 인상이었다.

할아버지에 얽힌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학문에 밝았던 할아버지와 달리 형제였던 큰할아버지는 힘이 장사였고, 일에 전념하셨던 분이었다. 어느 날 큰할아버지가 산에서 귀한 산삼 다섯 뿌리를 캐오셨다. 설왕설래 끝에, 우리 할아버지가 산삼을 팔러 대처로 나갔으나 소식이 끊긴 채 몇 달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오셨지만, 손에 든 것은 돈 대신 잘 지은 모시옷 한 벌뿐이었다.

이 모시옷을 받은 큰할머니는, 시동생을 미더워하셨던 마음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그 손을 꼬옥 잡아주셨다고 한다. 그런 큰할머니는 1899년에 태어나 2006년, 108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3세기를 산 인생이었다.

지금 저승에서도 큰할머니는 여전히 할아버지를 감싸주고 계실까. 아니면 “산삼 다섯 뿌리가 고작 모시옷 한 벌이란 말이여?” 하고 웃음 섞인 핀잔을 하셨을까.

2025년 6월 25일, 전쟁으로 희생된 할아버지를 비롯해 이 땅을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꽃 한 송이를 바친다.

신정일

문화사학자, '신택리지' 저자, (사)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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