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제(16일) 점심 무렵, 전화가 왔다. 익숙한 목소리, 울음을 꾹 참고 있었지만 다급함이 뚝뚝 묻어났다. 그의 아내였다. 얼마 전 병문안 갔던 그, 암 수술을 받고 조금 나아진 듯했지만, 의사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고 했단다. 마지막 인사를 전하라고, 그의 귀에 전화기를 대주었다고 했다.
아득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 들려줄 마지막 말이라니,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띠동갑이던 그의 하얀 얼굴이 눈물에 겹쳐 떠올랐다.
첫마디가 “아, 어떡해…” 왜 이 말부터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가 혼미한 의식 속에서 걷고 있을 끝없는 터널의 어둠 속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김 대표, 난 할 말이 없어요. 그저 미안합니다. 김 대표는 좋은 나라에 가 있을 거예요.” 그가 무신론자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말해야 편할 것 같았다. “편히 가 계세요. 나중에 따라갈게요. 우리 거기서 만나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짧은 말이었다. 더는 무슨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그 순간에 닿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세 시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고인’이라 부르지 못하는 건 그의 체온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마지막 예의라 여겨진다.
그의 아내가 말했다. “조 청장님께 필요하다고 사둔 드론을 꼭 드리라고 했어요.” 그게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지난 5월 16일, 병세가 조금 나아졌다고 운전도 할 수 있다며, 드론을 사놨다며, 비내섬에 갈 건데 시간이 되냐고 물었다. “어머니 병세가 안 좋아서 며칠 뒤에 보자.”고 미뤘던 그날, 그가 나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이 되었다. 이토록 길게 작별을 이야기하는 건, 그가 내 경찰 인생만큼이나 소중한 ‘여행작가’라는 두 번째 삶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생 2모작의 물꼬를 터준 이, 그였다.
그와의 인연은 충남경찰청장 시절, 자전거 순찰대를 만들며 시작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잡지 장기 연재라는 파격을 내게 안겨주었다. 국가하천 64개(지금은 73개)를 자전거로 완주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내 소망에 그는 말했다. “누구도 쉽게 달려들 수 없는 프로젝트입니다. 청장님은 하실 수 있어요.” 경찰학 박사 과정을 접고 ‘여행작가 과정’ 5개월에 등록했을 때, 주임교수는 웬일이냐며 교수를 바꿔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만큼 나도 결단이 컸고, 그가 준 용기도 컸다. 글이 먼저 실렸고, 작가 공부는 그다음이었다. 매달 잡지 10페이지를 채우는 압박감은 컸지만, 그는 언제나 용기를 줬다. 연재는 2013년에 시작되어 2018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넉 달 뒤, 그는 다시 말했다. “좀 쉬셨으니 다른 기획으로 연재를 시작하시지요.” 그리 시작한 게 ‘대중가요의 골목길’이다. 트로트 열풍이 불기 전이었다. <미스트롯> 첫 방영도 있기 전이었다. 그 연재도 3년을 이어갔다. 결국 잡지사는 문을 닫았다. 시대를 넘지 못한 전문지. 그 역시 ‘중도하차’였고 나도 그랬다. 하지만 ‘전도무효’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대중가요의 언저리를 맴도는 건 그 여진이다.
그의 슬픔은, 마지막 남은 자전거 전문잡지 <월간 자전거생활>의 퇴장이었다. 단행본 30여 권을 낸 글쟁이, 전문잡지 발행인이었던 그의 이름에 시대가 부당한 종언을 고했다. 그리고 그 절멸이 그를 조용히 데려갔다. 나이 59세. 환갑도 넘기지 못한 요절이었다.
고려대 철학과를 나온 그의 사유, 고대 산성을 꿰뚫어 시리즈 책으로 남긴 탐구심, 산하를 그려내는 글, 외산까지 꿰는 기억력, 영어 번역서, 한문 고전 독해,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섭렵했던 그의 능력.
우리는 ‘열두바꾸’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고, 매달 함께했다. 장관이 된 배우, 세계 자전거 여행가, 예비역 3성 장군, 전직 경찰인 나, 자전거에 미친 CEO까지. 모두 예전의 직함은 잊은 지 오래였다. 우리의 화두는 산천을 누비는 자전거였고, 그는 그 중심이었다.
이제 그 모임의 허브가 빠져나갔다. 우리는 그가 빠진 빈자리를 야윈 걸음으로 채우며, 추억할 것이다. 그를 부르며 기억할 것이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그와의 우정과 존경이 남아 있는 오늘 아침, 검은 정장을 챙겨 입고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간다.
누구나 결국 떠난다. 그것이 삶의 가장 확실한 명제다. 하지만 내가 유독 슬픈 건, 그가 공직을 떠난 내게 두 번째 삶의 길을 열어준 유일한 벗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상은 여전히 형광빛 미소로 말을 건넬 것 같다. 뜻밖의 조문객도 있었다. 10년 전, 두만강 500km를 함께 거슬러 오른 동행. 러ㆍ중ㆍ북 국경을 지나 백두산 북파까지 함께한 이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고위 관리가 함께했기에 가능한 여행이었다.
압록강과 송화강을 함께 가자던 그날의 약속은 이제 지켜지지 못했다. 그는 저 세상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고지를 오르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이름 모를 산하를 누비며 글을 엮고 있을 것이다.
잘 가시라. 잘 가 계시라.
지난 겨울, 남편을 떠나보낸 아우가 전해준 말이 떠오른다. 애별리고愛別離苦…
그의 무대는 뒤편으로 옮겨졌지만 아직 무대에 남은 나는 그와 나눴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에 눈물짓는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있으려므나, 굳이 갔겠느냐 물어도 그는 이 삶에서의 일정을 마친 것이다.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그리운 사람을 반가이 맞이할 것이다. 서러워도 참아야지. 그 눈물이 무거워 그가 갈 길을 막으면 안 되니까.
우리도 곧, 그 배를 타게 될 것이다. 이 육신으로 영생을 누릴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 않나. 그는 경계를 넘어갔고, 우리는 경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부디, 그를 잘 보내주자.
회사의 오너이자 진정한 어른으로 김병훈 대표님과 함께한 시간은 저에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청장님의 추모글을 보며 다시한번 김대표님과의 추억을 되새이게되어 감사하다는 말씀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