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칼럼

[톨스토이 고백록②] “내가 세계 최고작가가 된들 무엇이 달라질까?” 회의에 빠지다

톨스토이 작 <안나 카레니나>

‘세계 3대 고백록’으로 불리는 세 권은 4세기 기독교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프랑스 계몽사상가 루소의 <고백록>, 그리고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참회록>이다. 시대와 문화는 다르지만, 이 세 책은 모두 인간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아 성찰의 깊이를 보여준다. <아시아엔>은 이들 세 사람과 저작을 먼저 소개한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등을 정리해 나갈 계획이다. <편집자>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단순한 문학가를 넘어 삶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긴 사상가였다. 그의 인생 여정은 진보와 사회 변화에 대한 낙관적 믿음에서 출발했지만, 여러 사건과 개인적 고통을 통해 그 믿음이 무너지며 깊은 내면적 갈등과 존재론적 질문으로 나아갔다.

진보에 대한 미신적 믿음의 붕괴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사형 집행 장면을 목격했다. 사형수가 참혹하게 처형되는 모습을 목도하며 당시 유럽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회의가 싹텄다. ‘진보’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극단적 폭력이 인간의 본질적 선함과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진보나 이론이 아니라, 내 존재 전체로부터 나오는 깨달음”이라고 고백했다.

이후 젊은 형의 죽음은 그의 회의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형은 지혜롭고 선량했지만, 병상에서 자신과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당시의 철학이나 사회 이론은 이런 근본적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답을 주지 못했다. 톨스토이는 “어떤 이론도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고 절감했다.

일상과 사회활동, 그리고 내면의 공허

톨스토이는 이후 농노와 지주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농민학교에서 교육 활동을 하는 등 사회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혼란에 빠졌고, 점차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1862년 결혼 후에는 가족 부양에 몰두하며 외적 삶에 집중했으나, 그 역시 삶의 의미에 관한 내면적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글과 명성, 재산 등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완벽해도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무력했다. “내가 세계 최고의 작가가 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이 달라지느냐?”는 회의가 그를 엄습했다.

삶의 무의미함과 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이르러 톨스토이는 삶에 대한 근본적 무기력과 공허를 경험했다. 그는 “삶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무의미하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존재가 ‘정지된 상태’임을 자각하며, 삶의 진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죽음이 불가피한 현실임을 깨닫고, 그 공포는 점점 커졌다. 그는 자살까지 고려할 만큼 극심한 절망에 빠졌지만,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전쟁과 평화

내면의 위기와 그가 남긴 사상적 유산

톨스토이의 이런 내면 고뇌와 갈등은 그의 문학과 사상 전반에 깊이 반영됐다. 삶의 무의미함과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물음에 대한 치열한 탐색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같은 대작뿐 아니라, 후에 그가 발표한 윤리적·종교적 저작들에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는 단순히 문학적 천재가 아니라, 근대인이 겪는 존재론적 위기를 몸소 체험하고 사유한 사상가였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인간 삶의 의미, 진보에 대한 맹신, 죽음과 고통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여전히 유효한 답변을 제시한다.

윤재석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 저자, 傳奇叟(이야기꾼), '국민일보' 논설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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