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수만 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포로’도 아니었고, ‘귀환 병력’도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되었고, 해방 이후 또 다른 강제노동과 억류의 비극을 겪은 ‘잊혀진 피해자들’이었다.
일본 패망 후 소련군에 체포돼 소련연방 각 지역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일본군 소속 조선인 출신 포로들은 1948년 10월 말 고국 귀환을 위해 극동 하바롭스크 380수용소로 집결했다. 이들 가운데 2300명은 11월 28일 나홋가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다음날 흥남항에 도착했다. 이 중 만주 출신 1000여명은 만주로, 북한 출신 800명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남한 출신 500여명이 억울한 수용소 생활에 다시 내몰린 것이었다. 이들은 1949년 2월초부터 38선을 넘어 귀환하다 남측 군인과 경찰에 연행돼 파주경찰서에서 조사와 심문을 받고 인천 송월동 전재민 수용소로 압송돼 다시 수용생활을 해야 했다. 이 글은 이들 유가족의 외침과 관련한 것이다.
피해자 단체의 외침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시베리아 억류자 유족협의회(간사 문용식)는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이후 수차례에 외교부에 정식 질의서를 제출하며, “일본의 전쟁범죄로 인한 피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보다 분명하고 적극적인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질의서에는 구체적인 질문이 포함됐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과 소련 양국 정부에 의해 피해 입은 시베리아 억류자들에 대해,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어떤 외교적 조치를 취해왔는가?
2.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이 사안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실상 방관해온 정부의 태도는 정당한가?
3. 일본 정부가 자국의 해외 억류 피해자들에게 실시한 보상 사례를 고려할 때, 한국 피해자에게도 유사한 조치가 필요한 것 아닌가?
4. 한일 양국의 시베리아 억류자에 대한 정부 지원과 보상 실태를 비교해 보았는가?
5. 향후 한국 정부의 외교적 대응 계획은 무엇인가?
당시 협의회는 “대다수 피해자가 이미 고령으로 사망했고, 이제 남은 생존자는 거의 없다”며 “정부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 문용식 간사는 “3년 전 마지막 생존자셨던 이후녕 회장님이 별세해, 현재 생존자는 아무도 없다”고 전했다.
유족협의회에 따르면 시베리아 억류자 중에는 전직 통일부 차관이었던 분도 있다.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후녕 전 회장은 2022년 여름 무더위 속에 안부 전화를 했으나 받지 못한 채, 연락이 두절됐다고 문용식 간사는 전했다. 일본에 거주하던 지인도 그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문용식 간사는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억울함을 가슴에 묻고 살다가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셨다”며, “이런 상황을 정부가 알고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상 방기”라고 비판했다.
“국회, 정부 질타 있었지만, 국회도 정부도 그때 뿐…자기 가족이면 그랬겠나?”
2014년 9월 27일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성곤 전 의원은 외교부 장·차관 및 국장들을 상대로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질의하며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고 질타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10년 이상 외교부와 정부는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유족협의회는 2013년부터 외교부에 세 차례에 걸쳐 질의서를 보냈다. 1차는 2013년 5월 24일, 2차는 같은 해 7월 2일 외교부의 회신에 대한 재질의, 3차는 2015년 11월 등 모두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호한 답변뿐이었다.
특별법 있었지만, 실질 보상 안 돼 피해 회복 ‘요원’
2005년 제정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특별법’에 따라 억류자들은 일정 금액의 일시금과 생존자 의료지원비(연 80만원)를 받았지만, 이는 단순한 행정 보상일 뿐 피해 회복이나 정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5년과 2011년 국회는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관련 예산을 통과시켰지만,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는 여전히 빠져 있었다. 실질적인 배상은커녕, 법적 지위조차 모호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국제 기준에 크게 못 미치는 정부 대응
일본 정부는 자국의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에게 보상금 지급, 생활보조, 의료지원을 법률로 제정해 지속적인 지원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어떤 법적 틀도 마련하지 않았다. 이는 같은 피해를 입은 사람도 국적에 따라 보상 수준이 크게 달라지는 것으로 국제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문용식 간사는 “정부는 헌법 제10조와 제34조가 규정한 국민의 인간 존엄성과 생존권을 보장해야 할 책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새 정부 관심 갖고 뒤늦은 정의나마 실현을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문제는 단지 역사적 아픔을 되새기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전쟁범죄에 대한 정의 회복, 피해자 인권 회복의 문제이며, 동시에 국가 책임을 묻는 헌법적 과제다.
유족들은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생존자는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지금 정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영원히 미제로 남을 것이다.
정부는 이제 응답해야 한다. 피해자들의 억울함에, 국민의 역사정의 요구에,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한 진실한 국가의 책무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