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칼럼

[윤재석의 시선] 상월곡역에서 만난 과학입국의 첫걸음

지난 토요일, 고등학교 동기들과의 정기 산행을 위해 천장산(해발 140m)에 오르기 전 6호선 상월곡역에서 하차했다. 목적지는 바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뒤편 산길이었다. 근 한 시간의 전철 이동 끝에 도착한 상월곡역은 과학기술의 숨결로 가득했다.

대합실 천장에는 ‘KIST가 뇌질환과 장애를 극복할 기술 개발에 진력해 초고령화 사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문구가 적힌 분홍색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출구 벽면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존 폰 노이만,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등 현대 과학사를 빛낸 인물들의 사진이 나란히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1966년 2월 3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그 가운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유독 반가웠다. 초대 KIST 소장을 지낸 최형섭(1920~2004)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다. 필자는 1980년대 초 중앙일보 과학부에서 과학기술 분야를 담당하며 KIST를 자주 출입했고, 마침 인근의 한국과학원(KAIS) 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를 몇 차례 직접 뵌 적이 있다.

화학야금학이 전공이던 그는 놀라울 정도로 호방하고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과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1965년 4월, 박 대통령이 과학기술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작년에 스웨터를 2천만 달러어치나 수출했다”고 자랑하자, 당시 원자력연구소장이던 최형섭은 이렇게 응수했다.

“기특한 일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스웨터 쪼가리에 의지하시겠습니까? 일본은 이미 전자제품을 10억 달러 넘게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기술력입니다.”

일순간 분위기는 냉랭해졌지만, 박 대통령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뒤인 1966년, 베트남 파병에 따른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설립된 KIST의 초대 소장으로 최형섭을 임명했다. 후에 남덕우를 경제부총리에 발탁했던 것처럼, 박정희는 비판을 아끼지 않던 실력자를 중용했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 중이던 과학기술 인재들을 KIST로 불러들이며, 대통령보다 높은 급여를 지급해 서울대 공대 교수들 사이에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는 과학기술 역량 확보에 있어 정치적 통념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당시 KIST가 자리한 홍릉 과학단지에는 한국과학원(현 KAIST 서울캠퍼스), 국방과학연구소 등도 함께 입주해 있었다. 이곳은 ‘과학입국’이라는 구호 아래 자립기술 개발과 고급 두뇌 육성의 거점이 되었다.

개발연대 KIST의 업적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이 되었다. 포스코의 모태인 종합제철 기초 설계가 KIST에서 이뤄졌고, 초기 메모리 반도체 설계, 냉매제인 프레온가스 개발 역시 이곳 과학자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제철, 반도체, 가전 산업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KIST의 기술력과 인프라가 있었다.

이날 천장산을 오르며 1960~70년대 과학기술자들이 땀 흘렸던 그 길목을 지나온 나는, 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를 향하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다시금 떠올렸다. 홍릉의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과학입국의 꿈, 그 첫걸음에 있었던 이름들을 상월곡역에서 마주한 하루였다.

윤재석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 저자, 傳奇叟(이야기꾼), '국민일보' 논설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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