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미디어

[책과 인연] 장재선의 ‘영화로 보는 세상’…스크린 통해 세상과 사람을 읽다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는 스크린 위에서만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기억을 끌어내고, 낯선 타인의 삶을 내 이야기로 만드는 힘을 가졌다. 문화일보 장재선 기자가 2003년 펴낸 산문집 <영화로 보는 세상>(책만드는공장)은 바로 그 힘을 단정하고 따뜻한 문장으로 되살려낸다.

총 275쪽 분량의 이 책은 저자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문화일보에 연재한 칼럼과 새로 쓴 글을 묶은 것으로, 한 편 한 편이 영화와 현실을 잇는 인문적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40편 넘는 에피소드가 ‘기자의 눈’과 ‘시인의 마음’이 만나 영화 같은 기록으로 담겼다.

책에 등장하는 영화는 한국과 아시아, 헐리우드, 유럽을 아우르며 장르도 다양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교도소 월드컵’ ‘죽은 시인의 사회’ ‘쉰들러 리스트’ ‘레옹’ 등 지역과 장르를 넘나든다.

하지만 이 책의 진가는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를 매개로 현실의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따뜻하고 깊은 시선에 있다. IMF 외환위기 속에서 삶을 지키려는 소시민의 고통, 병든 사회에 치유가 필요한 순간, 종교와 정치 사이에서 흔들리는 공동체의 갈등 등이 영화 속 장면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장 기자는 단순한 리뷰나 줄거리 요약 대신, 영화 속 장면을 삶의 경계선 위에 세운다. 그가 다루고 강조하는 것은 늘 인간의 존엄, 삶의 고통, 그리고 그 너머의 연대와 희망이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평론가가 아닌 기자라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장재선은 영화 속 이야기를 책상 위가 아니라 현장에서 받아 적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땅을 딛고 있고, 그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옆에서 옆으로 향한다. 평론보다는 삶의 이야기이며, 분석보다는 성찰이다.

출간된 지 20년이 훨씬 지난 책이지만, 책 속의 에피소드와 영화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서, 독자 곁에서 “나를 좀 봐줘” 하고 말을 거는 듯하다. 세상이 더 복잡해지고, 영화가 더 빠르게 소비되는 오늘, 장재선의 이 책은 느리고 정직한 시선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그는 책머리에 “좋은 글 지으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신 이상기(한국기자협회회장) 선배님, 정소성(소설가) 교수님, 권문한(방일영문화재단) 선생님께 이 책이 작은 보답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썼다. 나도 무척 존경했던 정소성 교수님은 2020년 10월 저 세상으로 가셨고, 연세대 의대 이홍식 정신과 의사를 소개해줘 ‘자살보도준칙’을 기자협회와 자살예방협회가 같이 만들도록 다리를 놔준 권문한 선배 역시 언론계를 떠난지 오래다.

언론계에 남은 장재선 후배와 필자의 몫을 기쁘게 감당하리다.

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Back to top b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