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는 악 방관해선 안 돼”… 순교의 길 택한 저항 신학자
벼르고 벼르다 영화 <본회퍼: 목사. 스파이. 암살자>를 드디어 보았다. 개봉(4월 9일)한 지 3주가 지나서다. 아나키즘학회 일정 때문에 극장에 갈 틈이 없었다. 영화는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삶을 다룬 미국 다큐멘터리로, 배우 요나스 다슬러(Jonas Dassler)가 본회퍼 역할을 맡았다. 개봉일이 그의 순교일인 4월 9일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본회퍼 가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부유하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카를는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학자였고, 어머니 파울라는 교사였다. 형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장례식 장면은, 훗날 그의 반전(反戰) 사상의 배경을 암시한다.
본회퍼는 미국 유학 중 할렘의 흑인 교회 예배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유럽 교회와 달리 “살아 움직이는 교회”라는 인상을 받았고, 당시 인종차별 문제에도 적극 관심을 가졌다. 그는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았지만, 독일로 돌아간다. 그가 말한 “고난이 있는 곳에 교회도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히틀러 집권 후, 독일 교회는 전체주의에 굴복했다. 본회퍼는 이에 저항해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결성하고 지하 신학교를 운영했다. 그는 “은혜는 싸구려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참된 신앙은 행위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하지만 유대인 학살과 나치의 만행을 목격하며 생각이 달라졌다. 히틀러 제거에 가담할 정도로, 행동하는 신앙을 선택했다. 그는 독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외방첩청(Abwehr) 카나리스 제독의 추천으로 정보요원 신분을 얻게 된다.
특히 유대인들을 방첩대 요원으로 위장해 스위스로 탈출시키는 ‘작전 7’은 영화에서도 긴장감 있게 묘사된다. 국경을 넘는 장면에서 국경수비대에게 뇌물을 건네는 등, 숨막히는 탈출 과정이 펼쳐진다.
이후 그는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발키리 작전’에 가담한다. 그러나 히틀러의 일정 변경으로 계획은 실패했고, 1943년 4월 5일 체포된다. 2년 뒤인 1945년 4월 9일, 바이에른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영화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생을 마무리한다.
함께 고백교회를 결성했던 마르틴 니묄러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반핵·평화운동가로 활동했다. 본회퍼는 순교했고, 니묄러는 살아남아 그의 유산을 전했다. 본회퍼가 남긴 신학적 유산은 방대하다. 대표적인 저서 <성도의 교제>, <옥중서신>, <나를 따르라> 등은 그가 단지 신학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저항자였음을 보여준다.
나는 지금 <본회퍼의 삶과 신학>(마크 디바인 지음, 정은영 옮김, 한스컨텐츠 간)을 다시 읽고 있다. 영화를 본 후 처음부터 다시 정독하고 싶어졌다. 본회퍼는 왜 평화주의자에서 암살기도자, 그리고 교수대로까지 가는 길을 선택했는가. 그 대답은 명확하다. “교회는 악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그 결단의 무게를 절제된 연출로 그려낸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편이 영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이 배경이고, 배우도 독일인인데, 독일어가 아니라 영어로 진행되는 점은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본회퍼의 마지막 독백과 신념이 독일어 특유의 질감으로 들렸다면, 훨씬 더 진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종교와 국가 권력, 신앙과 행동, 도덕과 정치가 뒤엉킨 시대. 그 안에서 본회퍼는 결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길의 끝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택한 죽음은 단지 개인의 종말이 아니라, 시대를 향한 신앙의 항의였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살아 있는 질문이다.

※ 관련 참고도서
- <본회퍼의 삶과 신학> (마크 디바인 저, 한스컨텐츠)
- <옥중서신>, <성도의 교제>,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