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날에 돌아보는 세대 간의 대화
아이들이 대학에 다닐 때였다. 나는 용돈을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흐뭇했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라 용돈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나로선, 친구들에게 짜장면이나 빵을 얻어먹으며 기죽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사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런데 어느 날, 딸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주는 용돈, 그냥 던져 버리고 싶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우리 아빠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나는, 뜻밖의 말에 묘한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정직한 노동으로 가족이 감사히 먹을 밥을 마련한다고 믿었고, 자식에게 주는 용돈도 내 피와 땀의 결실이라 생각했다. 딸의 한마디는 내 가슴을 유리조각으로 긋는 듯한 아픔이었다.
딸을 유학 보낸 뒤 혼자 남아 지낸 시간 동안 나는 ‘기러기 아빠’의 심정을 글로 적었다. 그런데 딸의 친구가 그 글을 보고 “너희 아빠는 왜 그렇게 징징거리니?”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아이들 입장에선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들도 내게 말을 꺼냈다.
“아빠는 용돈을 줄 때 그냥 주지 않고 꼭 한마디 해. 피같은 돈이니까 아껴 쓰라는 말이 내 가슴을 찌르듯 해. 아빠하고 나는 신분이 달라. 아빠는 가난한 집 아들이었지만 나는 변호사 집 아들이야. 내가 왜 아빠처럼 살아야 해?”
아들의 말은 마치 망치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이었다. 나는 뭘 잘못한 것일까.
아들은 ‘헬조선’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했다. 나는 그 표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자라던 1950~60년대의 환경을 기록이나 영상으로라도 봤다면, 아이들이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번은 법무장교 시절 동기였던 변호사를 만났다. 나는 수도군단 사령부에서, 그는 보안사령부에서 복무했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극빈 속에서 자랐지만, 경기중·고등학교와 서울법대를 거쳐 변호사가 되며 형편이 달라졌지. 그래서 내 아이들과는 코드가 맞지 않아. 아이들에겐 그게 불행일 수 있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나처럼 세대 간의 간극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군 시절, 사병들이 북한 삐라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반공법으로 처벌받는 것에 반대해, 전국 보안부대에 ‘반공법 위반으로 잡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했다. 그런 판단은 그가 극빈 속에서 자라며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는 “보안사령부 창고의 기록들을 읽어보니, 박정희 정권 초기에 우리는 세계적 극빈국이었더군.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잘살았고, 그래서 반공교육이 필요했던 거야. 간첩이 넘어오면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거짓말을 시키기도 했지”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헬조선’은, 어쩌면 우리가 살던 시대였다. 우리는 그 지옥 같은 시절을 벗어나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 천국은 우리가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리며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자식과 손자 세대에게는 공감이 쉽지 않다.
얼마 전, 광화문 시위에 다녀온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MZ세대 아이가 다가오더니 ‘어르신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세대를 넘어선 소통의 기쁨이 배어 있었다. 어린이날인 오늘,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는 아이들과 정말 대화를 나누었는가. 그들과 진심으로 마음을 맞대려 했는가. 코드가 맞지 않는 게 아니라, 어쩌면 다가서지 못한 건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