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애국가 4절까지 울려퍼진 베이직교회 주일예배

베이직교회 주일예배(4.13) 동영상
https://youtu.be/nZxLH_G1ifs

주기도문

사사기 5:19-31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승전가는 원래 이기고 온 사람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이기고 온 사람은 그저 그 찬양을 즐기면 됩니다. 그런데 드보라와 바락의 찬양은 이런 종류의 승전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이끈 리더를 향한 찬양이 아닙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라는 것이죠. 성경의 승전가는 다 그렇습니다. 승리를 경험했지만 승리한 사람들을 위한 찬양이 아니라, 승리한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승전가 내용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함과 더불어 신앙고백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찬양을 그대로 부르진 않아도, 이 찬양의 고백처럼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찬양은 곧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찬양을 함께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삿5:19]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가나안 왕 야빈은 시스라를 등에 업고 승리를 자신했습니다. 심지어 주변 가나안 왕들도 와서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뭐 이스라엘은 고작 해봤자 만 명인데 가나안 연합군은 시스라의 철병거 900대뿐만 아니라 많은 군사가 함께했습니다. 당연히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왕들은 얼마나 들떴을까요? ‘무얼 더 가져갈 수 있을까? 이번에는 얼마나 더 가져갈 수 있을까? 얼른 전쟁을 마치고 금의환향해야겠다.’ 이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락과 함께한 이스라엘 군대에 패배했습니다. 드보라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삿5:20-21]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전승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별들이 비를 내리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별들이 싸웠다고 말합니다. 비가 내려서 이겼다는 표현입니다. 비를 제어하시는 하나님께서 이기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면 가나안의 점술가들은 별을 보며 점을 쳤습니다. 가나안의 점술가들은 별을 보며 점을 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별을 제어할 순 없습니다. 당연히 시스라와 가나안 왕이 이길거라 점쳤겠죠. 또 절대 비가 안 올 거라고 점쳤겠죠. 그래서 시스라 군대는 기손 강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기손 강은 평상시 말라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능한 사람들인데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비가 안올 거라는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그 많은 군대를 옮길 이유가 없습니다. 900대 병거를 옮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런데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비가 오는 모양새를 보고 도망가고자 했으면 얼른 퇴각했을 겁니다. 도망가지 못할 만큼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겁니다. 그들을 표류시킬 만큼 엄청난 비가 쏟아진 것이죠. 그들의 예상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별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입니다. 비를 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명의 군대로도 승리를 얻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결국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승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승리를 안겨주시는 분입니다. 당연한 승리가 아니라 언제나 어려움 중에 승리케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강함도 강함이 아닙니다.

[고전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도, 어떤 무기도, 어떤 군대도 강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지혜로운 사람도 지혜롭다고 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을 우리는 교만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을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역전의 하나님입니다. 약하다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강하다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족하다고 움츠러들 필요 없습니다. 많다고 자만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렇게 강하다는 가나안 군대는 일부는 물에 잠겼고, 일부는 도망갔습니다.

[삿5:22] 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군마들이 당황해서 허우적거리고 도망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4장에서는 상세히 얘기합니다.

[삿4:15-16] 15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16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얼마나 대단했는지 군사적 요충지인 하로셋학고임까지 추격하고 한 사람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핵심 군사기지 하나가 완전히 날아간 겁니다. 이 승리가 더욱 값진 것은 가나안 왕 야빈은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20년 동안이나 가나안의 속국으로 지내다 풀려나게 됐습니다. 이스라엘을 억누르고 있던 강력한 군마들이 두려워 도망갔습니다. 억눌려 있던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강한 자를 이겨 약한 자가 자유를 얻는 일입니다. 구원은 자유를 얻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곧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이죠. 우리는 이 사건에서 이들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가나안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는 범죄가 이들을 옭아맸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드보라를 세워주시고, 바락도 전쟁하게 하시고 완전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범죄는 옭아매고, 회개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범죄는 우리를 계속 옭아맵니다. 그 범죄를 숨기기 위해, 혹은 더 강력한 자극을 위해 더 큰 범죄를 저지릅니다. 우리 습성이 그렇습니다. 범죄는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들여다보면 나를 죄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은 우릴 자유케 합니다. 우릴 범죄로부터 풀려나게 합니다. 하나님께 묶인 것 같지만 그 안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를 누립니다. 구원을 얻는 것이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면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눅4:18-19]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인생을 죄에서 풀려나게 할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조각이 이미 드보라와 바락의 승리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거대한 세상이, 거대한 세상의 힘이 우릴 짓누르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린 그것으로부터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군마가 도망가듯 사단이 우릴 옭아매지 못하고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삿5: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이 메로스에 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전쟁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추측합니다. 가까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저주를 받은 이유가 전쟁에 나오지 않은 것이라면 함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스라엘 지파도 포함한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지파들을 향한 저주는 거듭거듭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패배를 예상했으니 안 나왔겠죠. 당연히 질만한 전쟁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패배를 예상했다는 것은 결국 승리를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승리를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특이한 것은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움이 필요한 분입니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는 분인데 굳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 이들을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함께할 이들에게 함께 승리를 맛볼 기회를 주시는 것이죠. 이런 상황을 마주한 입장에서는 믿음의 챌린지가 들어온 겁니다. 믿음의 시험인 것이죠. 성경의 수많은 사람은 이런 테스트를 거치며 믿음이 성장하고 또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다윗은 형들에게 음식을 전달해 주러 전쟁터에 왔다가 그의 앞에 믿음의 테스트장이 열리게 됐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안 들었으면 됐는데 저 멀리서 모욕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군사 중에 아무도, 심지어 왕인 사울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욕을 듣고만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믿음의 테스트장이 열렸는데 아무도 테스트를 통과할 자신이 없는 겁니다. 믿음의 테스트장으로 담대히 다윗이 걸어갑니다. 그리고 골리앗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은 젊은 나이에 호기로움 덕분이었는지 믿음의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합니다. 오히려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눈앞에 9척 장신이 있어도, 전쟁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에게 절대 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람에겐 상황이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겁니다. 믿음의 도전은 원래 안 보이는 미래를 알고 가는 미래로 바꿔야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승리라는 미래를 보고 담대히 가는 것이죠. 심지어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담대함으로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옳은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지 내가 잘되려고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시기에 가는 것입니다.

[삿5:24-27] 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7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향한 저주는 한 절인데에 비해 야엘에 관한 내용은 4절이나 됩니다.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는 장면을 꽤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엘은 겐 사람의 아내입니다. 이방 여인이란 뜻입니다. 겐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과는 호의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나안과는 동맹관계에 있었습니다. 유목민이었다는 특성상 지내는 곳의 상황에 맞게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시스라가 헤벨의 집에 들어가 편히 잠을 청했겠죠. 아무튼 야엘이 어떤 여인인지 자세히 나오고 있진 않지만 이방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있었던 여인으로 생각됩니다. 시스라가 물을 청했는데 우유를 줍니다. 기세등등하던 시스라가 어머니의 젖을 먹는, 우유를 먹는 어린 아이가 됩니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야엘은 이미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장막 말뚝을 가져와 단박에 팍! 관자놀이를 뚫습니다. 당시 장막 치는 일을 여자가 했기 때문에 야엘에게 장막 말뚝을 이용하는 것은 가장 익숙한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상치 않은 사람, 예상치 못했던 도구를 사용해 승리하게 하신 것이죠.

시스라가 죽는 장면을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꾸부러지며를 세 번, 엎드려졌다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며 그의 죽음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클라이맥스의 순간을, 그 승리의 순간을 함께 나누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가 기대나 했겠습니까? 바락은 비의 도움을 받고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한 이방 여인의 손에 죽을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 믿음으로 참전한 사람의 손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승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 참전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온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출신의 차이가 아닙니다.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어떤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매주 예배는 드리지만 매일 삶의 영적 전투에 참전하고 있는지, 정말로 교회로 살고자 애쓰고 있는지,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종교 행위에 빠져 당연히 축복의 길로 가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저주와 축복은 종교심, 종교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나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영적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가? 이것에 달려 있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예배드린다고 하지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으로 살라고, 믿음으로 승리를 먼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 때 상 주시는 분입니다. 우릴 영적 전쟁에서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삿5:28-30] 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어리석게도 시스라의 어머니는 죽은 시스라를 기다립니다. 당연히 시스라가 이기고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완전히 반대로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늦는 이유가 어떤 사고가 아니라 노략물이 많아서 늦는 거라 착각한 겁니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자기 최면을 걸어보는 것이죠.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한테 있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며 설마 안 좋은 일이 나한테 있겠어?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계시진 않습니까? 내게 주어진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의 교만을 꺾으시는 분입니다.

또 시스라는 여자를 노략물로 취하곤 했습니다. 그냥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성적으로 문란했 다는 뜻입니다. 시스라 뿐만 아니라 그걸 보는 어머니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죄에 둔감해진 겁니다. 교만이 도를 넘어 범죄가 당연해졌습니다. 내가 강하니까 자기 맘대로 하는 거 아닙니까? 교만이죠. 반복되면 범죄가 자연스러워지는 겁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이니까요. 범죄를 저질러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결국 망할 것입니다.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어리석은 겁니다. 매일 승승장구하는 줄 알죠. 매일 범죄를 밥 먹듯이 행하죠.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봐도 눈감아주죠.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다가 완전히 망해버릴 겁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삿5:31]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이 이길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900대의 병거, 매번 승리로 노략물을 한껏 챙겨 부를 이룬 시스라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 반전의 하나님입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이런 반전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반전이 있을 때야 사람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당연히 질 것 같은 힘 없는 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해가 힘 있게 돋움 같게 하셔서 세상이 말하는 힘 있는 자를 밟으시는 분입니다. 악을 처단하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가장 힘없는 자로 오셨습니다. 말구유에 아기로, 목수의 아들로,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 예수로 오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장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악에 묶여 있는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역전시켜 영원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가장 힘없는 모습으로 오셔서 세상을 지배하는 공중 권세를,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계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승리를 약속받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d-day를 지나 v-day 승리의 날로 가고 있는 줄 믿습니다. 승리는 정해졌습니다. 어리석게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들, 죄가 당연해진 자들은 결국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 끝까지 영적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자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함께 승리의 반열에 오를 것입니다.

[요일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난주간을 시작하며 승리를 향해 가신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묵상하십쇼. 힘없는 자가 되셔서 힘 있는 자를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쇼. 완전한 승리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라가십쇼. 그 길이 아무리 고난의 길일지라도 승리를 향해 가는 길이기에 담대히 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 >

1.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마주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나요? 그때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 점차 죄가 자연스러워졌던 경험이 있나요? 어떻게 회개하고 끊어냈나요?
3. 고난주간 나의 영적 전쟁터는 어디입니까?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 준비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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