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무스오르타 동티모르 대통령, 한국 국회서 ‘2026 인터넷평화상’ 수상…민병철 선플재단 19년 운동, 세계로 확장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 되새기며 “기술은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한·동티모르 청소년 교류와 ‘착한 AI 운동’ 추진
2008년 2월 11일,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통령 관저를 습격한 무장세력의 총탄에 조제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이 쓰러졌다. 중상을 입고 호주로 긴급 후송된 그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가 회복 과정에서 세상에 전한 메시지는 복수가 아니라 용서였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겠다는 그의 선택은 오랜 독립투쟁과 내전을 겪은 동티모르에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갈등을 또 다른 갈등으로 갚지 않겠다는 평화의 신념이었다.
18년이 흐른 2026년 11월 6일, 그가 대한민국 국회를 찾았다. 이번에는 전쟁과 독립이 아니라 인터넷 공간의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199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조제 라무스오르타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대통령이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2026 인터넷평화상(Internet Peace Prize)’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 선플재단(이사장 민병철 중앙대학교 석좌교수)과 국회 선플위원회가 마련한 자리였다.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은 수상 연설에서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새로운 도전을 이야기했다. “기술은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인류가 결코 기술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언어와 얼굴, 목소리까지 만들어 내는 시대다. 기술은 소통의 장벽을 허무는 한편 거짓 정보와 혐오 표현, 딥페이크 범죄를 확산시키는 수단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지나온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이제 디지털 공간에서도 인간의 존엄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는 평화가 거창한 선언에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평화는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시작된다. 평화는 우리가 선택하는 말, 우리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는 존중,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 주는 모범에서 시작된다.”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살릴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메시지였다.
김대중과 라무스오르타, 아시아의 두 노벨평화상 수상자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의 삶은 동티모르 현대사와 겹친다. 1975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한 이후 그는 해외에서 외교활동을 벌이며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무장투쟁 대신 국제사회의 양심과 연대에 호소하는 길을 선택했다.
1996년 가톨릭 성직자 카를루스 벨루 주교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동티모르는 오랜 투쟁 끝에 2002년 독립국가로 출범했다. 이번 수상 연설에서 그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특별히 언급했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 주민투표 이후 폭력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국제사회의 행동을 촉구했던 김 전 대통령의 역할을 기억한 것이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과 1996년 수상자 라무스오르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했지만, 대화와 인권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서 김대중을 기린 장면은 아시아의 평화가 국경을 넘어 서로의 역사와 연결돼 있음을 보여줬다.
악플로 잃은 생명에서 시작된 19년의 선플운동
이날 시상식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었다. 민병철 이사장이 2007년 시작한 선플운동의 역사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인터넷 악성댓글로 인한 인격권 침해와 극단적 선택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익명성 뒤에 숨어 던지는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병철 이사장은 악플을 비난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악플에 맞서는 방법으로 ‘선플’, 곧 상대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댓글을 제안했다. 공격적인 언어를 줄이는 것뿐 아니라 따뜻한 말과 공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확산시키자는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실천이었지만 학교와 시민사회, 국회로 퍼져 나갔다. 선플재단에 따르면 지난 19년 동안 84만 9천여 명이 운동에 참여했고, 누적 선플은 1000만 개를 넘어섰다. 제21대 국회의원 299명 전원이 선플정치선언문에 서명한 일도 있었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시민운동이 정치권과 교육현장으로 확장된 것이다. 선플재단은 2018년 인터넷평화상을 제정하며 활동의 무대를 국제사회로 넓혔다. 첫 수상자는 일본 가와사키 지역에서 재일 한국인과 외국인 주민을 향한 혐오 발언에 맞서 온 시민단체 연대체와 악성댓글 예방 교육에 힘써 온 일본의 오기소 켄이었다.
한국인을 향한 혐오에 반대한 일본 시민들에게 한국의 민간재단이 평화상을 수여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다. 그리고 8년 뒤, 그 상은 동티모르 독립과 화해의 상징인 현직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국경과 민족을 넘어 존중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한 사람들을 연결하는 흐름이 이어진 셈이다.
AI가 말을 만드는 시대, 인간은 어떤 말을 선택할 것인가
선플운동이 출범했던 2007년과 오늘의 인터넷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당시의 주요 문제가 익명 게시판의 악성댓글이었다면, 이제는 AI가 가짜 사진과 영상을 만들고 실제 사람의 목소리까지 모방하는 시대다. 딥페이크 범죄와 허위정보 유포, 온라인 혐오가 민주주의와 개인의 삶을 위협하는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다.
선플재단은 지난 9월 9일 운동 19주년을 맞아 국회의원과 13개국 외교사절, 교사와 청소년 등이 참여한 가운데 ‘AI 딥페이크·악플 추방’ 선언식을 열었다. 디지털 공간에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보호하자는 취지였다. 이번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의 수상은 그 선언을 국제적 실천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선플재단과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은 ‘인류 평화를 위한 착한 AI 운동(Kind AI for Human Peace)’을 함께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AI를 혐오와 조작의 도구가 아니라 상호 이해와 평화를 증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구상이다. 양측은 한국과 동티모르 청소년을 위한 단기 교환 방문과 AI 윤리·디지털 리터러시 공동 교육 프로그램도 추진할 계획이다.
청소년들이 기술의 편리함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떻게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여야 의원과 5개국 대사 한자리에
이날 시상식에는 여야 국회의원 10명과 5개국 주한 대사, 전국선플교사협의회 회장단, 학생대표 및 선플운동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국회에서는 송석준 외교통일위원장을 비롯해 송영길 대통령 평화외교특보, 강경숙·김대식·김영진·문정복·민홍철·백선희·이정헌·이헌승 의원이 자리를 함께했다.
송석준 위원장은 환영사에서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의 수상이 한국과 동티모르의 우호협력을 증진하고, 안전한 디지털 환경을 위한 국제협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정헌 국회 선플위원회 공동위원장은 “AI 딥페이크와 악플로부터 국민의 존엄을 지키는 일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며 선플운동이 제도적으로 뿌리내리도록 국회가 뒷받침하겠다고 강조했다.
민병철 이사장은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의 삶과 선플운동의 정신을 연결했다. “총탄을 용서로 이겨 낸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의 삶이야말로 AI 시대 디지털 평화가 나아갈 길을 보여 준다.” 그는 이번 수상이 막말과 혐오 표현으로 갈등을 겪는 국제사회에 공존과 존중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총탄에서 악플까지, 평화의 출발점은 인간의 존엄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이 걸어온 길과 민병철 이사장이 시작한 선플운동은 출발점이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은 독립을 빼앗긴 조국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세계를 다녔다. 다른 한 사람은 인터넷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댓글 하나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은 분명하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라무스오르타 대통령이 총탄 앞에서 용서를 선택했다면, 선플운동은 악플 앞에서 존중의 언어를 선택했다.
AI는 앞으로 더 빠르게 발전하고, 인간이 만든 말과 기계가 생성한 말을 구분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기술의 성능만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판단과 책임이다.
2026년 11월 6일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시상식은 19년 전 한국에서 시작된 작은 댓글 운동이 한 나라의 대통령, 그것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만나 세계를 향한 새로운 약속으로 이어진 자리였다. 총탄을 용서했던 한 평화운동가는 이제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술을 통해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넬 것인가.
평화의 출발점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